횡단일지

횡단일지

2006년 유럽종단 일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6-21 11:34
조회
1542

파리 시각 2006년 3월 24일


파리공항에 도착하니 오후 5시 50분 수속 밟고 짐을 찾아 나오는데 한 시간이 걸려, 7시에 집사님소개로 두 분이나 기다리시고 계셨다. 차를 타고 숙소로 오니 8시 40분이였다. 나는 비행기에서 좀 잤는데도 너무나 피곤하여 침대에 누워 옷도 벗지 않은 채 오후 11시 30분까지 정신없이 잤다.


잠에서 겨우 깨어 밥을 먹고 정신을 차려 지금 일지를 쓰고 있다. 지난 해 부터 그렇게 준비해오던 유럽종단이 오늘에서야 드디어 유럽 땅인 파리에 내릴 수 있었다. 한국에서 비행기에 오르기까지만 해도 많은 생각과 착찹한 마음을 어떻게 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비행기가 이륙하고 몇 시간 후에야 그런 마음들은 사라지면서 용기가 생기는 마음을 느낄 수가 있었다. 비행기 속에서 내내 생각을 해보았다. “왜 나는 이렇게 도전하고 무모한 일을 하는 것인가”를 이 세상에 태어나는 손, 발 못 쓰는 뇌성마비로 태어나 어릴 때부터 가족들 모두가 손, 발을 못 쓰기 때문에, 처음부터 모든 걸 다른 사람이 해줘야 되기 때문에, 나 혼자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라는 그런 생각을 갖게 했기 때문이라는 이유가 아닌가 하는 생각을 또 한 번 하게 한다.


이것이 내 스스로의 또 다른 마음을 갖게 했다. 기회가 주어지고 운이 닿는다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있고 이 세상에 어느 누구가 하지 못했는 것을 해보겠다는 결심을 했다. 이런 생각이 바로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 자기와 또 다른 사람을 위하는, 크게는 나라에 기여하는 일을 이룩해내므로, 무조건 장애인이라서 도움만 받는 것이 아니라 무엇인가를 해낼 수 있다는 걸 보여줄 수 있다는 생각들이, 99년 월드컵을 위한 우리나라1500km 국토종단이였다. 2000년도에는 IMF로 인해 어려운 사람, 힘든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는 세계최초 미대륙횡단. 2003년도에는 대구U-대회를 알리는 일본열도 종단을 하였다.


지금의 유럽종단을 시작하게 하였는 것들이다. 이 모든 것들을 볼 때 중증의 장애인이 뭔가 해내고 사람들에게 중증장애인도 할 수 있구나, 비장애인도 할 수 없는 것을 해내었구나, 나라의 위상을 떨칠 수 있는 일을 해 낼 수 있구나 하는 그런 생각을 할 수 있게끔 했는 것이 아닌가 하는 나의 생각이다.


이런 마음을 갖게 하는 것이 지금의 “통일 코리아”라는 슬로건을 걸고 세계 기네스북이라 하는 인간이라는 최고기록의 경연장에 나의 기록을 남기고 싶다는 마음이고, 거기에 나도 도전을 한다. 이렇게 하는 것이 오늘이라는 흔적을 남길 수 있고 내일이라는 것을 바라볼 수 있는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한다. 그렇다. 바로 중증장애인이지만 통일의 마음을 갖고 기네스북에 도전이라는 마음으로 흔적을 남기는 것이 통일을 되기 전까지 표시를 남기는 것이고 내일이 아닌 또 다른 미래에 흔적을 남길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그래,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보자. 그래, 한국의 세계최초인 역사의 한 페이지를 만들어보자.


지금 파리에 처음으로 도착했지만 제일 중요한 차가 되어있지 않아 막막하지만은 새로운 모책을 만들고 없는 것을 가능하게 만들어보자. 재혁이와 나의 노력이라면은 가능할 수 있다.


지난 해 부터 준비를 했지만 오늘 도착하기 15일 전에만 해도 아무것도 되어있지 않아 불투명이였다. 그렇지만은 나를 돕는 재혁이와, 우리 사무실의 모든 직원들. 우리를 알고 있는 분들이 마음을 함께 해주셨기 때문에, 몇 일 두지 않은 날짜에 그 동안 고생했지만은 아무런 빛도 보이지 않던 것이, 희망의 동아줄이 내려왔습니다.


대한항공, 휠체어업체 휠로피아, 사랑의 열매(공동모금회), 우리은행, 대구시청, 이런 분들의 정성과 마음들이 다 모여왔습니다. 그래서 저는 이 낮선 파리에서 자정을 넘겨 새벽1시가 되어 바깥의 가로등 불빛을 창문사이로 보면서 각오를 다짐합니다. 꼭 성공하리라는 것을!


재혁이와 우리 두 사람은 이 유럽에서 꼭 모책을 찾아 출발의 스타트를 끊어 성공이라는 결승선을 도달 할 것이라고 “재혁아 그 때까지 파이팅!” 모든 힘든 걸 너에게 맡겼지만 꼭 해낼 수 있다는 마음이 강하게 전달해오니 우리는 이룩해 낼 수 있을 것이다. 힘들고 어렵겠지만은 재혁이 너의 또 다른 목표가 있으니 이번 일을 성공해 내고, 너의 또 다른 것을 찾아서 너의 것으로 만들어봐.


젊음은 도전이고 무한한 가능성으로 성공의 열매를 탄생 시킬 수 있을 것이다. 이제 자고 내일 열심히 하여 출발선을 만들어보자.




그리스 시각 2006년 5월 10일 수요일


온도30도, 종단거리 72.8KM


아침에 진짜 눈은 일찍 떨어졌다. 피곤한 재혁이도 깨우고 서둘러 준비를 했다. 회장님 사모님은 우리를 위해서 아침 준비와 낮에 먹을 음식도 알뜰히 챙겨주시고 신경써주셨다. 회장님 사모님과 우리는 다 같이 출발지인 아크로폴리스 신전 극장으로 갔다.


행사장에 가니 그리스 경찰과 올림픽위원장님, 그리스 우리나라 동포, 200분 중에서 20분이나 와 계셨다. 막상 그 출발 현장에 가니 말 그대로, 문명이 처음으로 시작된 곳이며 온 갖 신들께서 계셨던 절이라는 걸 눈에도 들어왔고 마음에도 와 닿았다. 우리가 아는 모든 신들이 나를 맞이해주는 것 같았다.


그 분들의 소리가 내 마음과 귀에도 들리는 것 같았다. 진짜 내가 어떻게 이 문명이 시작이 신들이 있었던 이곳을 올까하는 생각을 했겠는가? 그렇게 많은 분들의 축하와 격려 위원장님의 축사 우리 한인회분들은 격려, 목사님의 기도 그 모든 것들이 나의 출발선의 스타트를 끊게했다. 나는 출발을 하면서 신들에게 한번더 기도를 했다. 지구상의 평화와 유일하게 남아있는 분단국가의 통일이 하루빨리 오게 해 달라고.


부족한 사람이지만 마음만은 세계와 평화와 통일이 더 크다고, 그렇게 그리스 경찰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출발을 했다. 그리스에 상쾌한 공기가 나의 몸을 더 가볍게 해주었고 지나가는 모든 사람들의 눈길은 내게로 다 쏠렸으며 경찰마저도 사진을 찍어가며 관광객, 차를 타고 분들마다 손을 흔들고 그리스어로 최고라고 하며, 힘내라는 말이였다.


길거리에 서 있으신 분들도 치고 응원을 해주셨고 오토바이를 젊은이들도 최고하고 하면서 인사를 하면서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그렇게 7KMM를 갔을 때쯤 드디어 외각으로 들어섰따. 마주오고 가는 하는 차선이 1차선이였다. 나의 횡단 때문에 모든 차들은 뒤에 줄을 서 있었지만 클락션 한 번 울리지 않았고, 마주오는 차들은 클락션을 울리고 손을 흔들어주고 라이트까지도 이용해서 격려의 표시를 해주었다. 트럭을 운전하면서도 나의 모습을 담기위해서 찍기도 했다.


말 그대로 마음의 기쁨이고 한국인의 영광이라고 할 수 있었다. 진짜 통일의 길에 흔적을 남기는 일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차로 넘었던 산이였는데 오늘 드디어 내가 직접 휠체어로 넘게 되었다. 산이 얼마나 높고 큰지 하루종일 올라서야 오후 늦게 마을이 보였으며 내려오면서 보이는 말은 너무나 아름다웠다. 그렇지만 전동휠체어 밧데리 표시등이 하나 둘 꺼지고 밧데리를 교체할 때마다 이일을 어떻게 하나라는 생각뿐이다. 밤잠을 못자도 다 할 수가 없었다. 진짜 난감하고 비극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


그런데 지금 쉬고 있는 마을은 너무나 작다. 어떻게 설명할까? 대구의 우방랜드 안의 경치와 비슷하다고 할 수 있다. 우방랜드의 놀이기구는 빼고 쉴수 있는 공간, 산책로 처럼 동화책 속의 마을이다.


내가 한 바퀴 둘러보았는데 내가 듣고 보도 못했던 마을이다. 즐겁고 정겹고, 지금 12시가 다 되었는데 불빛은 찬란하고, 불빛 위로는 나무가 덮여져있고, 연인들도 다니고 많은 사람들도 정겨운 이야기를 나누고, 그리고 하늘에서는 둥그런 달이 우리를 비추고 있는걸 보니 우리의 마음이 어떻다고 표현 할 수 가 없다.


그리고 또 한편으로는 마음이 어떻게 착찹하다고나 할 수 있을까. 이제 시작이 되었고 너무나 큰 결승이라서 그런가? 나는 재혁이한테 조금전에 프랑스로 전화를 해보라고 했다. 결과는 우리생각과 별 다름이 없었다.


바로 그 집에서 일하는 아주머니가 우리 짐을 빠트려뒀다는 것이다. 마음 같아서는 가서 어떻게 할 수도 있지만은 그러지도 못하고 환장할 지경이다. 어떻게 충전기 하나를 가지고 프랑스까지 그 때까지 버틴단 말인가? 이제는 할 수 없고 방안을 그래도 찾을 수 밖에 없다.


아참, 그리고 오늘은 너무 출발은 좋았는데 사고가 두 번 있었다. 휠체어 밧데리가 다 되어 힘이 없어서 산길을 오르다가 길이 기울어진 길이라서 전동이 막바로 옆길로 굴러 들어갔다.


그것이 절벽 이였다면 나는 오늘 흔적도 없이 어떻게 되었을 수도 있었다. 그렇게 운 좋게 위기를 모면하고 가는데 얼마안되어 뒤에 따라오는 차가 나의 전동을 박아버렸다. 카바의 한 쪽 귀퉁이가 날라가버리고 운좋게도 나는 몸에 아무 이상이 없었다.




그리스 시각 2006년 5월 13일 토요일


온도 25도, 종단거리 67KM


St. Ekaterini - Domokos - Neo Monaethploy - Neon Monastirion-Vrysia - Farsala


오늘은 어떻게 써야 할 지 모르겠다. 너무나 감격적이고 이런 일은 평생가도 느껴 볼 수도 없을 것 같은 하루였기 때문이다. 나뿐만 아니라 재혁이도 감동을 받아 아직까지 그 감격을 잊지 못하고 있다. 아니 평생 동안 못 잊겠다고 한다.


물론, 나도 그렇다. LAMIA경찰서에서 나는 차안에서 잘 자고 일어나서 준비하다가 보니 참, 재혁이 혼자라서 그런건지 너무나 역부족이라는 걸 새삼 한번 더 느꼈다. 혼자서 모든 걸 다 할려고 하니 시간은 시간데로 가고 그랬기 때문이다.


오늘도 열두시 다되어서야 출발할 수가 있었다. 준비를 하다 보니까. 그렇게 출발을 했는데 오늘은 이상하게 LAMIA경찰차 한 대만 에스코트를 하는 것이 아니라 뒤에는 경찰사이크로 에스코트를 하는 것이다. 그래, 어제 넘었으니까 이제 산을 내려가는 길이구나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였다.


어제보다 더 높은 산을 오르는 것 이였다. 어제 올랐던 산은 산도 아니였다. 너무너무 높고 너무나 꼬불꼬불하여 앞을 볼 수가 없었다. 오르면 오를 수록 공기는 더 차가웠고 그래도 햇빛은 나를 더욱더 따갑게 했다. 그런데 지나가는 차들 모두가 응원이 아니라 눈빛이 감격의 눈빛이고 경이로운 눈빛이였다.


차 한 대도 그냥 지나가는 차가 없었고 모두가 격려를 해주었다. 에스코트를 해주는 경찰분들도 그 모습에 감동을 받았는지 연신 나를 쳐다보면서 웃으면서 힘내라는 몸짓을 계속 해주었다. 그렇게 얼마나 올랐을가 옆을 잠깐 뒤돌아 보니 LAMIA동네가 눈안에 펼쳐졌다.


“저기서 내가 잠을 자고 이렇게 출발을 하였구나.” 하는 마음이 너무나 감격스러웠다. 거기에다가 양쪽에 노란 유채꽃은 나를 맞이하면서 노랗게 산길을 인도를 하는 것 같았고 차가운 바람에 유채꽃 향기는 나의 코 속으로 들어오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힘나게 해주었다. 지금에서야 말이지 골반 때문에 걱정했는데, 또 다른 걱정이 있다. 한국에 있을 때 목이 안좋았는데 병원에 가서 진찰을 한 번 해봐야 되겠다고 마음만 먹고 가지도 않았는데. 지금 횡단, 종단 시작했는지가 딱 4일째인데 목이 너무나 아파서 고통을 견딜수가 없다.


너무 아플때에는 고개를 움직일 수도 없다. 혹시 목 디스크가 아닌가 하는 의심까지도 들 지경이다. 지금도 너무 고통스러워서 눈앞에서는 별이 보일 지경이다. 진짜 마음으로는 너무나 아파서 조정기를 입에서 놓고 싶을 지경이다. 그러나 이런 기분과 고통을 잊을 수 있는 순간이 펼쳐졌다.


드디어 산 꼭대기까지 올라섰다. 어제 눈이 쌓여 있던 높은 산을 봤던 그 곳이 지금 내가 꼭대기에 서 있는 산 아래에 있었다. 눈 덮여 있는 산보다 더 높은 산에 내가 있는 것이였다. 이제는 내려가는 일만 남았다.


내려가는데 그리스 모든 것이 눈안에 다 들어올 지경이였다. 그런데 나로 인해 일차선이라서 내가 가는 차선은 모두가 길이 올 스톱이 되었는 것이다. 산을 반쯤 내려와서 뒤돌아 보니 너무나 놀랍고 감동이였다.


그 꼬불꼬불한 그 산에 꼭대기에서부터 내 뒤에 차까지 밀려있었던 것이다. 차의 끝은 보이지 않았다. 그 현상을 말로써 표현 하자면은 그 높은 산에 꼭대기에서부터 꼬불꼬불 온 산을 차들이 휘어감고 있었던 것이다.


바로 엄청난 긴 용이 그 높은 산을 휘어감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그것이 몇 분이 아니고 몇 시간이나 그렇게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 누구도 클락션 한번 울리지 않고 얼굴찌푸리거나 투정하는 사람은 그 누구도 없었다. 가끔씩 마주오는 차가 없을 때에는 에스코트하는 경찰이 추월을 한 두 대씩 시켰지만 추월하는 작은차, 큰차, 트럭, 관광버스 그 한사람, 한사람이 나를 놓치지 않았다. 힘내라는 격려가 아니고 찬사의 눈빛과 감동의 눈빛이였다.


마주오는 차들도 운전대를 내 몰라라 하고 전부 손벽과 파이팅라는 말과 멋있다는 밖에 였다. 그것을 보는 에스코트하는 경찰분들도 감격을 하여 나를 연심으로 보면서 힘내라고 같이 응원을 하였다. 내가 그리스 인도 아니고, 진짜 말 그대로 작은 나라에서 왔고 우리나라에서는 나를 그렇게 인정해주는 사람도 없는데 그렇게 수 많은 사람들이 감격의 눈빛, 서로 나를 응원해주고 차가 몇시간이나 산꼭대기에서 산 밑까지 움직이지 못해도 그렇게 나를 보고 감동받는 모습은 어느누구가 그렇게 받을 수 있다는 말인가? 진정으로 이 땅에 생명으로써 그렇게 오늘처럼 영광스러운 것을 받아보고 본 적이 없었다. 어느누구도 몇 번 죽었다가 깨어난다고 하여도 그런 감동적인 순간을 받아보지 못할 것이다.


나도 앞으로 두 번 다시 받아볼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그 광경은 눈도 한 번 깜짝할 수 없는 그런 놓칠 수 없는 순간이였기 때문이다. 그것을 어떻게 많은 분들에게도 전할 수 없는 절경이였다.


재혁이도 너무나 감동을 받아서 지금도 어떻게 표현하지 못하고 있다. 말 그대로 영광스러운 날이였고 역사적인 날이였다고 말 할 수 밖에 없다. 지금 Farsala마을에서 차안이 아닌 경찰서 안의 경찰 침실방에서 편안하게 잘려고 한다.





폴란드 시각 2006년 7월 8일 토요일


온도 40도, 종단거리 105KM am 10:35~ pm 9:20


Wielogora - Wsola - Radomka - Jedlinsk - Jedlanka - Zdzary - Gozd - Siekluki - -Grojec - Gruchow - Pamiatka - Rembertow - Tarczyn - Grzedy - Wola Mrokowska - Mrokow - Jabtonowo - Kol. Warszawska - Wygoda - Marysin- Tazy - Sekocin nowy - Janki - Raszyn - warszawa


자다가, 자다가 보니 별 신기한 곳에서 잠을 자는 것 같다. 라돔경찰서에서 우리가 잠자리를 알아보다가 마땅한 장소가 나오지 않는다 하면서 경찰서에서 자라고 했다. 그랬는데 바로 우리가 잔 곳은 죄를 지었는 사람들을 임시로 보호하는 곳이였다.


쉽게 말하면 임시감옥소였다. 그런데 우리는 죄인도 아닌데 아무리 규칙이지만 밤에 잘때에는 밖에서 문을 잠궜는 것이다. 나갈일이 있으면은 문을 두드려라고 하는 것이다. 죄를 지었는 사람도 아니고, 문을 잠궜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하여도 규칙이 그렇다 하니, 그걸 지켜줄 수 밖에 없었다.


어떻게 되었든 임시감옥소였던 어디였든 다리를 펴고 자기는 잘 잤다. 나는 이틀 째 아침도 먹지도 않고 출발했다. 새로 입술 화상 났는 곳은 상처가 더 번져서 고통을 일로 말로 할 수가 없었다.


거기에다가 온도는 40도가 넘으니 전동조정하는 것도 참, 힘들기만 했다. 그래서 매일같이 100km를 달려서 그런건지 몸이 더 무거워서 어느 주유소에서 쉬었는데 음료수도 주시는 분도 계시고 그런걸 보고 이렇게 쉴 때가 아니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몸을 다시 추슬러서 출발 할 수 밖에 없었다.


어제 만났던 크리스토프분께서 사모님까지 데리고 우리를 촬영하러 오셨다. 사모님께서도 나를 반갑게 격려를 해주셨고 이 곳 수도 바르샤바까지 동행촬영을 했다. 서기관님과 한인회 총무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놓은 숙소에서 기다리시면서 우리를 맞이해주셨고 폴란드 이곳은 시내에 들어올때에만 경찰이 에스코트를 해주는데, 밤9시가 넘어까지 경찰에스코트를 받으며 들어오고 있는데 환하고 동그란, 말 그대로 보름달이 나의 정면을 비추는 걸 볼 수 있었다.


왠지 환하게 웃으면서 나를 맞이해주는 그런 느낌을 들게 했다. 그렇게 달의 인사를 받으면서 들어오니 서기관님과 총무님이 맞이해주셨다. 특히, 밤이 늦어서인지 서기관님께서는 사모님한테 이야기하셔 특별히 주먹밥까지 준비해오셨다.


그렇게 일정에 대해서 간단하게 이야기를 나눈 뒤, 두 분은 돌아가시고 크리스토프와 사모님과 우리 네 사람이 한국음식도 보여주고 맛도 보여주면서 낮에 찍었던 비디오도 같이 보면서 이야기를 나눴다.


그리고 크리스토프씨는 이 곳 폴란드에서만 나의 모습을 찍고 싶다는 것이 아니라 유럽일정을 다 찍고 싶다고 하셨다. 우리는 환영이지만 그 분들의 사비까지 털어서 해야되니 미안한 마음만 들기도 한다.


그렇게 한 시가 넘게 이야기도 하고 놀다가 헤어지고 이제 잘려고 한다. 오늘하고 내일까지 쉬게 되는데 피곤한 것을 한 번 다 풀렸으면 좋겠다. 오늘까지 달린 거리는 3,177.8km이다.




폴란드 시각 2006년 7월 11일 화요일


온도 40도, 종단거리 69.7KM am 10:10~ pm 5:20


Marki - Nowe Stupno - Stupno - Trojany - Gtuchy - Niegow - Gaj - Lucynow - Tumanek - Wyszkow - Bug - Turzyn - Ojcowizna


이 틀동안 한인회와 대사관 덕분에 잘 쉬고 출발을 했다. 타는 듯한 무더위는 식을 줄 몰랐고, 쉬었는데도 피곤해서 정신이 없었다. 그 와중에서도 많은 현지인 분들이 사진도 찍고 격려할 때마다 정신이 조금 들기도 했다.


오늘 지나가시는 동포분들도 만났고 경찰까지도 나의 모습을 사진을 찍어가셨다. 그런데 오후에 지나가는데 현지인 분들이 아이를 데리고 우리를 기다리고 계셨다. 바로 테트, 레나타, 다리아, 로잘리아 두 가정이시다. 사진도 찍고 하여 잠깐 섰더니 집이 가까우니까 차라도 한잔 하라고 가라고 하였다.


그래서 우리는 거절도 못하고 들렸는데 자고 가라고 부탁도 하고 잡아서 오늘 하루는 횡단을 이쯤에서 멈추고 쉬기로 했다. 그렇게 대접을 너무 융숭하게 받았고 나를 너무 대단하고 좋게 보니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그런데 이분들 덕분에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말을 가까이에서 만져보기도 하고 특히 말을 탔다. 진짜 그 기분은 말로 어떻게 할 수가 없다. 지금도. 길에서 우연히 만나서 인연이 되었는데 생각도 못했는 말까지도 타보고 지금은 융숭한 대접과 편안한 잠자리까지 있으니 내가 생각하기로는 그렇게 내 자신에 대해서 크고 대단하다고 생각하지 않는데 이분들은 왜 나를 그렇게 보는지


그리고 또 이분들과 인연이 되어 친구로 하기도 하고 오늘 진짜 큰 인연을 맺었는 것 같다.





폴란드 시각 2006년 7월 12일 수요일


온도 40도, 종단거리 101.1KM am 9:50~ pm 8:45


Trzcianka - Dybki - Ostrow Mazowiecka - Podborze - Prosienica - Wyszomierz - Ostrozne - Zambrow - Wisniewo - Mezenin - Stare Krzewo - Jezewo Stare


잘 자고, 일어나보니 벌써 우리를 위한 아침준비가 되어있었고, 레나타씨는 어제부터 나를 먹는 것을 오늘 까지도 계속 해주셨다. 그래 나를 먹여주고 싶어했고, 그렇게 즐거워 하셨다.


아침을 먹고 난 후에도 나와 헤어지기 싫어서 내 수동휠체어를 밀어서 집안 구석구석을 다녔고, 넓은 마당도 구석구석 밀고 나가면서 나하고 조금 더 이야기를 하고 헤어지는 걸 못내 아쉬워 했다. 말굽도 주시고 천사의 인형도 나한테 선물로 주시기도 했다. 나도 출발할 시간이 다가 올 수록 헤어지는게 아쉬웠다. 왠지 가족같기도 하고 친한 친구 같기도 하였기 때문이다.


그렇게 인사를 하였고 헤어지는데도 도로까지 따라나오셨고, 테트씨도 나와 포옹을 하면서 자꾸 아쉬운 눈치를 보이시면서 인사를 해주셨다. 레나타씨도 나와 자꾸 포옹을 하면서 몸조심하라고 하고 잘 가라고 자꾸 헤어지기 싫어하는 눈치를 자꾸 보여 주셨다.


그렇게 아쉬운 작별을 하고 횡단, 종단을 시작했다. 어제에 이어 오늘도 계속 오르막이였고 내리막이였다. 그런데 오전내내 가는 길이 울퉁불퉁하여 조정하는데 몹시 고생을 했으며, 오후가 접어들으니 길은 좀 나아지는 것 같았으나. 40도가 넘는 무더위는 나를 지치기 하는 것 같았으며


바람까지 불기 시작하여 쓰고 있는 모자까지 자꾸 비틀게 틀려 자꾸 조정하는 걸 멈추게 했다. 뒤 따라오는 재혁이는 자꾸 멈추고 뛰어와서 모자를 바로 해주는데도 그것은 30분이고 바람은 자꾸 내 모자의 시야를 가리게 했다. 그것도 모자라 모자를 매번 벗겨갔다. 마음같아서는 쓰기 싫었으나 화상입은 입술에는 자꾸 고름이 나고 오늘은 피까지 계속 나여 모자를 안쓸려고 해도 안쓸수가 없었다.


그렇고 보니 독일 월드컵에 축구 때문에 입술이 조금 좋아지는 것 같더니 요즘 더 심해져서 쓰라리는 것은 더욱 심해졌고 상처는 더욱 깊어졌다. 그런데 바람이 내 모자를 벗겨가는 것도 모자라 한쪽에서는 빛이 나는데 오른쪽에서는 번개가 번쩍 거리는 걸 눈앞에서 볼수가 있었으며, 비까지 쏟아졌다.


그래서 가는 길을 멈추고 비가 그칠 때 까지 한 옆에 피해있었따다. 그런데 그 비가내린뒤 하얀 구름사이로 무지개가 들어났다. 그 무지개를 따리 왠지 천사들과 신선들이 내려오는 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하기도 했다.


그렇다보니 비가 조금 멈추는 것 같아서 다시 출발했다. 그런데 비가 또 쏟아지기 시작하여 시간은 늦어지고 도저히 멈출수가 없어서 비옷을 입기로 했다. 그런데 비옷을 입은 후에몇 분도 안 되었는데 비가 그쳤다.


비가 왠지 나를 헛수고 하도록 만드는 것 같았다. 크리스토프씨가 또 나의 모습을 촬영하기 위해서 오늘 오셨다. 매번 만날 때마다 너무너무 나를 반갑게 하고 기쁘게 해주셔서 너무 고맙기도 하다.


9시가 다 되어서 횡단을 마쳤는데 잠자리를 못 구해서 크리스토프씨가 같이 잠자리를 구하는데 도움을 주셨다. 그런데 나는 다리아 한테 전화를 했다. 잠자리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더니 알아보겠다고 하더니 조금 기다리라고 연락을 했다.


큰 성당의 사람에게 부탁을 했다. 그래서 다리아 더분으로 성당에서 저녁도 먹고 크리스토프씨랑 이야기를 했다. 그런데 잠자리가 너무 좋아서 큰 호텔에 온 착각까지 들기도 한다.





핀란드 시각 2006년 8월 5일 토요일


온도 28도, 종단거리 84.3KM am 11:15 ~ pm 8:20


TASKILA - PAENIEMI - HERUKKA - HAUKIPUDAS - KELLO - KIMINKIJOKI - LI - ILJOKI - OLHAVA- KUIVANIEMI - MYLLYKANGAS -KUIVAJOKI - LAPPI - SIMO


생각지도 않은 현지인분집에서 이틀이나 쉬고 또 기둥뿌리까지 흔들리게 했다. 음식이고 음료수이고 우리는 너무 잘 먹었기 때문이다. 마우리씨께서 오늘 아침도 정성스럽게 준비를 해주셔서 맛있게 먹었다.


떠날려고 하니 길이 너무 복잡하다고 하면서 안내해주시겠다고 하면서 자전거로 오우르시내를 벗어나는 것까지 자전거로 나를 길을 안내해주셨다. 그렇게 작별을 하고 재혁이와 나는 횡단을 시작했다. 어제 교류한다고 쉬어서 그런건지 몸 무거운 것은 많이 가벼워졌는 것 같았다.


그런데 내가 이곳 신문에 칼라로 기사내용이 너무 길게 나와서 그런건지 많은 분들이 알아보고 또 오늘 하루는 격려가 너무 많았다. 특히, 돈도 몇 번이나 후원이나 해주시고 또 어떤 아주머니께서는 지나가시다가 나한테 뭘 주고 싶어서 차를 뒤지더니 곰인형을 주셨다.


그리고 그 분께 나는 처음으로 키스도 받았다. 이렇게 많은 분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지나가는데 또 앞에서 한 가족분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바로 지금 신세지고 있는 가족분들이시다. 앙탁씨 가족분들이신데 총5분이 휴가로 여행을 가시는 중에 나의 모습을 발견하고 신문에서 봤다하면서 먹을 것도 주시고 했다.


그래 재혁이는 오늘 밤에 전기가 필요한데 어떻게 안되겠느냐고 하여 기꺼이 휴가장소로 우리를 초대하셨다. 그런데 우리는 초대를 받고 횡단, 종단을 더 하다가 8시 20분경에 마치고 멈추었는 장소를 표시해두고 차를 타고 뒤돌아 왔다. 뒤돌아 오니 우리를 마중나와 있었고 또 이 장소로 오니 너무 반갑게 온 가족분들이 나를 맞이해주셨다.


강도 구경하고 우리나라로 말하면은 별장이라고 할 수 있는데 둘러볼수 있도록 안내까지 해주셨다. 또 저녁식사를 준비해놓으셨는데 유럽에 핀란드식의 음식먹는 식을 배울 수가 있었다.


생선요리고 야채요리가 너무 입안에서 녹는 듯했다. 그리고 특히 생선요리를 하셨는데 나를 위해서 특별히 밖으로 가지고 나가셔서 생선가시를 다 발라내시고 나를 손수 먹여주셨다. 매번 쓰는 말이지만 진짜 처음봤는 동양인인데 이렇게 감탄하시고 먹는 음식까지 세세하게 신경을 써주시니 우리나라 말로 참, 나 쥐구멍이라도 있으면 들어가고 싶었다.


계속 나를 보시면은 아무도 할 수 없는 일을 한다고 하시고 대단하시다고 감탄하고 칭찬을 하시니 내가 몸들바를 모르겠다. 내 몸을 어디에 두었으면 좋을까 하는 생각을 할 지경이다. 내 자신을 생각해도 그렇게 대단하다고 여기지도 않는데 너무너무 대단하게 보시니 오늘 대접받은 것은 대통령대접받는것 보다가 더 큰 대접을 받은 것이다.


도저히 황송해서 어떻게 표현을 다 해야할 지 모르겠다.





스웨덴 시각 2006년 8월 6일 일요일


온도 22도, 종단거리 76.5KM pm 12:00 ~ pm 9:20


Simojoki Salmon river - KEMI - KEMIJOKI - LAURILA - TORNIO - KAAKAMO - LAIVANIEMI - ALARAUMMO - YLI - RAUMO - SVERIGE - HAPARANDA KOMMUN - HARRIOJA


마틱씨와 재혁이는 밤새 놀다가 새벽 4시 되어서 자러 들어왔다. 그 후에 아침에 일어나보니 모든 식구가 일어나서 아침준비를 요란하게 해놨다. 탁자 다리가 휘어질 정도라고 하면은 될려나 모르겠다.


그렇게 아침도 맛있게 먹고 또 이야기도 나누고 우리 오늘 잠자리가 걱정이 되어서 여기저기 아시는 분한테 전화도 하고 하시고는 했다. 그리고 우리들한테 또 카드까지 정겨운말씀을 써주셨다. 그렇게 식사를 마치고 우리는 출발하기 위해서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하루종일 휠체어 조정을 하면서 생각을 해보았다. 처음 본 우리에게 어떻게 마음이 그렇게 통하여 그렇게 해주실까?




스웨덴 시각 2006년 8월 30일 수요일


온도 20도, 종단거리 63.8KM pm 12:10 ~ pm 8:10


SLOTTSBRON - KARLSTADS KOMMUN - NORSALVEN - BJORKAS MOTET - SKUTBERGES MOTET - BERGVIKS MOTET - HULTSBERGS MOTET - VAXNASMOTET - KLARAMOTET - ALVMOTET - KLARALVEN - BERGMOTET - KROPPKARRS MOTET - UNIVERSITETS MOTET - VASE K:A - KRISTINEHAMNS KOMMUN


밤새 사경을 헤매다가 아침이 되어 겨우 살아 남은 듯 했다. 감기인데 왜그래 사경을 헤매었는지 생각해보니 3달이 넘는 동안 내 몸을 너무 혹사했는 것이 그 감기에 몸살까지 합한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이곳까지 오면서 비 하루종일 맞고, 새벽2시까지 조정하는 날이 있었으며, 특별한 날 빼고는 제대로 쉬어본 날도 없었고 하니 어찌 견딜 수가 있었겠는가. 말 그래도 밤에는 열이 불덩이 처럼 오르고 뼈마디는 다 떨어져 나가는 것 같았으며 지난해 다쳐서 수술했는 어깨도 왜그래 아픈지 열이 너무 많이 오르니 정신은 없는 와중에도 목이 타서 죽을 것만 같아서 말로 해야되는데 말은 나오지도 않고 재혁이는 앞에 운전석에서 한 번 잠들면 업어가도 모르니 진짜 어제 밤 같아서는 옆에 간호하는 사람이 있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목이 타고 갈증이 나는 건 생전 처음 인 것 같았다.


‘ 진짜 옆에 간호하는 사람이 한 사람이라도 있었으면 조금이라도 허리나 몸 어느곳이라도 한번 만져주면 숨이 라도 쉴 정도였다.


그렇게 아픈 것을 혼자 밤새 차안에서 견뎌내고 보니 아침이 되자 내 느낌에도 눈이 완전 쑥 들어갔다는 생각도 느낄 정도였다. 재혁이가 일어나라고 하면서 아침먹자고 차 문을 여는데 들어오는 오른쪽에 바람이 얼마나 환기를 들게 하는지 일어나라고는 했지만 죽어도 일어나기 싫었다. 그런데 전기만 겨우 빌려서 충전을 했고 마냥 차안에 있을 수 없고 해서,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억지로 옷을 입고 휠체어에 앉았지만 몸은 땅바닥으로 내려않는 것 같고 머리는 띵하고 눈도 자꾸 감기고 숨을 쉴때마다 입으로 용처럼 뜨거운 열이 뿜어 나오는 걸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하나 둘씩 재혁이는 차안에 출발하기 위해 정리를 다 해가고 나는 자꾸 정신도 가물가물하고 이걸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 같아서는 땅바닥에 눕고 싶었고 돈이라도 있으면 숙소를 구해서 누워있으면 좋겠다는 기분이 들었다. 그렇지만 그것은 생각뿐이였고 재혁이는 다 준비가 끝났다고 출발해도 된다고 그래 죽기나 살기나 한 번 해보자고 다짐하면서 출발했다.


조정하는데도 눈은 자꾸 감기고 몸은 자꾸 전동속으로 가라앉는 것 같고 완전 죽음의 사경을 헤매는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멈추고 그 자리에 가만히 있고 싶었다. 그런 마음을 하늘이 알았는지 아니면 나를 살리기 위해서 인지 언론 두 곳에서 인터뷰를 했다. 두 번째 신문은 이 곳 우럽에 와서 제일 긴 시간을 인터뷰 했는 것 같다. 한 ,길에서 한 시간 넘게 인터뷰를 했는 것이다. 나는 옆에 가만히 있고 재혁이가 통역하기 때문에 휠체어를 조정하지 않고 가만히 그 자체가 조금이라도 살 것 같았다. 그렇지만 기자 앞에서 아픈 내색을 안낼려고 하는 것도 그것도 고통이였다. 그렇게 하루 종일 비몽사몽간에 조정을 했고 오후 5시가 넘어서니 그 때에서야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고 온몸의 쑤시고 온 몸의 고통이 멈추는 것 같고, 콧물도 좀 멈추는 것 같았다.


참, 내가 생각해도 지독한 것 같다. 그렇게 밤새 아프고 낮에도 그렇게 안좋은데도 그걸 무릎쓰고 하다니 폴란드에서 크리스트토프씨가 나에게 해줬는 몸짓을 보고 내 몸을 함부로 하지 않아야 되겠다고 결심했는데도 그 마음처럼 내 몸을 어떻게 하지도 않고 혹사 시키는 걸 보니 나는 어쩔 수 없는 가 보다. 그렇게 죽을 것 같으면서도 8시 넘도록 조정을 했으며 오늘 3일째 전기만 빌려 차에서 또 밤을 지새게 된다.


몸 아픈게 내일 자고 나면 좀 나았으면 좋겠다.





스웨덴 시각 2006년 9월 15일 금요일


온도 16도, 종단거리 132.3KM am 10:20 ~ pm 10:40


KRONOBERGS LAN - UPPVIDINGE KOMMUN - ASEDA - BADEBODA - GLASRIKET - VAXJO KOMMUN - SKARTARYD - N AREDA - INNAREN - VAXJO - VAXJO O - NORREMARKS RONDELLEN - TRAFIKPLATS HOVSHAGA - TRAFIKPLATS ARABY - TRAFIKPLATS HELGEVARMA - MARKLANDA - ALVESTA KOMMUN - HUSEBY - GOTTASA - LOVHULT


지금 밤 12시가 넘었고 눈도 감기고 온 몸이 무겁고 피곤해 죽겠다. 참, 내가 생각해도 제 정신이 아닌 것 같다. 휠체어를 12시간 넘게 조정을 했으며 이것이 다가 아니다. 시작할 때부터 바람과 비가 내렸는데도 춥고 힘들고 특히, 비가 오면 몸과 마음도 영 안좋은데 그렇게 악조건인데도 오전 10시 되어서 시작하여 밤 11시 다 되어 갈때까지 했으니 어떻게 내 정신이라고 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기록을 깼다. 130KM가 넘는 기록이 나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현지인분들에 대해서 한번 써봐야 되겠다. 우리 머리로는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는다. 어제 그렇게 현지인분 집에 잠을 잤는데 아주머니 혼자 계셨고 우리가 전기만 빌릴려고 했는데도 거실까지 내어 준것이다.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밤 10시가 넘어서 아저씨가 일을 하고 집에 돌아오셨는데 생전 처음봤는 동양인이고 장애인인데 이런 사람들이 거실에 들어와 있는데도 아주머니한테 이사람들이 누구냐? 왜 이렇게 우리집에 와 있느냐? 그런 이유도 묻지도 않은 걸 보고 너무 놀랐다.


그냥 평소에 봐왔던 사람이 집에 와 있는 것 처럼 그렇게 대해 주시는 것이다. 그리고 밤 12시가 넘어서 아드님도 왔는데 조금도 우리를 보고 으아해, 하지도 않으며 그냥 재혁이하고 편안하게 인사를 나누는 것이다. 그래 오늘 아침에도 비가 내리는데도 내가 다 준비해서 떠날때까지 같이 밖에서 계시면서 나를 비옷 입는 것도 도와주시고 그렇게 배웅을 해주셨는 것이다.


아무리 문화와 풍습이 다르다고 하지만 도저히 우리나라 사람은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집도 아름다웠는데 그 집을 아저씨가 직접 손수 3년 동안 지으셨다고 한다. 문틀이고, 바닥, 수도관 땡겨오는 것 하나에서 열까지 혼자 다 하셨다는 것이다.


나는 그 이야기를 듣고 진짜 놀랐다. 그리고 이 곳 유럽의 분들은 대부분 다 몇 년 걸쳐 혼자서 집을 다 짓는다고 하신다. 인건비가 워낙에 비싸니까 몇 년이 걸려도 혼자서 집을 만들고 세우는 것이다. 집 구석구석을 봐도 어느 한 곳 틈 벌어진 곳도 없었다. 일류 전문가가 만들었는 집처럼 그랬다.


그리고 지금 우리가 쉬고 있는 이곳도 진짜 운도 좋고 너무 좋으신 분들을 만났는 것이다. 11시가 다 되도록 휠체어 조정을 했는데 밤 12시가 다 되었는데 현지인분집이 있어. 미안함을 무릎쓰고 부탁을 했는데 전기만 빌려줬는 것이 아니라, 호텔 방 하나까지 다 무료로 내어주시는 것이다.


바로 우리한테 전기를 빌려주신 분이 바로 호텔주인이기 때문에 밤 12시가 다되어서 피곤에 지쳐서 아주 초라한 모습의 사람이 특히, 스웨덴사람이 아니고 피부색도 다른 외국인인데 그렇게 흔쾌히 아무리 본인들이 호텔주인이라고 하지만 그렇게 무료로 내어주는 것이 없는데 참, 우리나라는 있을 수 없는 일들이 많이 일어난다.


어느정도 조금의 얼굴이라도 아는 경우라면 이렇게 배려해주시는 것에 대해서 이해가 된다고 하지만은 진짜 이렇게 처음봤는 사람들한테 이렇게 모든걸 다 빌려주고 내어주는 걸 보니 어떻게 이분들에 대해 설명을 잘 못하겠다.


아무튼 한가지는 알겠다. 서로 다 같은 사람이니 같이 믿고 살겠다는 그 마음인것이다. 그 마음을 우리도 배워야 되지만 전 세계인들이 다 이렇다면은 불신하고 못 믿는 그런 일은 생기지 않을 것 같다.





영국 시각 2006년 10월 31일 화요일


온도 10도, 종단거리 55.9km am 10:00 ~ pm 5:00


Grenoside - Eastfield Arms - Newmillerdam - Wakefeld - Outwood - Lofthouse - Robin Hood - Leeds


쉐필드 회장님 댁에서 잘 쉬고 아침에 눈을 떴는데 바람을 느낄 수가 있었다. 소리가 집안까지 들렸기 때문이다. 아침을 먹고 사모님이 챙겨주는 점심과 또 우리를 보기 위해서 목사님 내외분도 오셨다.


간단하게 이야기도 나누고 기념촬영을 하고 출발을 했다. 거센바람과 빗방울이 계속 뿌렸다. 그것이 하루종일 이어졌다. 바람이 얼마나 세찬지 뼈속으로 스며드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바람이 엉덩이 밑으로 들어오는데 왠지 얼음판위에 하루종일 앉아있는 것 같았다.


이렇게 해서 어떻게 겨울을 이겨낼까 하는 걱정밖에 들지 않았다. 바람은 앞에서 불어오니 코와 귀와 얼굴이 어는 것 같았다. 그렇게 하루종일 힘든과정 속에서도 현지분들의 뜨거운 격려와 응원은 차가운 세찬바람을 녹이는 듯 했다.


거기에다가 어떤분은 주머니에 있는 걸 다 후원해주시고 스낵도 주시고 어떻게 마음으로써는 표현할 수 없는 기분을 느끼게 했다. 리즈에 도착하니 목사님이 우리를 맞이해주셨고 집안에 들어서니 사모님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분주한 음식준비를 하시고 계셨다.


맛있는 음식냄새가 나의 식욕을 자극시켰다. 그런데 하루종일 바람과 싸워서 그런건지 도저히 피곤해서 온몸을 맥을 추질 못했다. 그렇게 좀 있으니 한인회장님과 사모님도 오셨다.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도저히 눈이 감겨 견딜수가 없어서 실례를 무릎쓰고 잠깐 눈을 감고 있었다. 그렇게 좀 있자니 피곤함을 이길 수가 있었고 식사준비가 다 되어서 같이 먹고 그 후에 거실에서 다 모여 기념촬영도 하고 과일도 먹고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리고 목사님의 애기들과 한인회장님의 애기들이 나를 위해서 그림도 그리고 힘을 주는 메시지였다. 아이들이 주는 메시지는 천사가 주는 메시지라고 생각이 들기에 더 기분이 좋았다.


한인회장님이 조금전에 메시지를 적으시다가 오늘이 10월의 마지막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왠지 10월의 마지막 밤이라는 노래가사도 생각이 났다. 벌써 유럽에 왔는지가 8개월이 다되었는 것이다.


그리고 오늘이 할로윈데이라는 걸 더 실감나게 했다. 지금 쉬고 있는 목사님댁에 동네아이들이 여러 가지 탈을 다 쓰고 사탕, 쵸콜렛을 받으러 연달아 계속 현관문을 노크하는 것이다.


이날이 미국에서도 한번 보았는데 이번에 유럽에서 보는게 두 번째다. 나도 왠지 마음같아서는 아이들처럼 동물이나 아니면 피터팬이나 그런 탈을 쓰고 같이 한번 놀아봤으면 좋겠다 하는 생각도 들었다.




영국 시각 2006년 11월 1일 수요일


- 3일째, 영국의 차가운 맞바람과 전쟁을 벌였다.


온도 10도, 종단거리 55.4km am 11:10 ~ pm 6:00


HAREWOOD - engage - Haiiagate - HARROGATE - KILLINGHALL - RIVERNIDD - WORMALD GREEN - RIPON - RIVER SWALE - HAMBLETOW DISTRICT - RIVER SWALE


오늘 아침도 왠일인지 밝은 태양이 창문을 밝히고 나의 잠을 깨웠다. 영국의 날씨가 맞는가 하는 생각을 하면서 목사님과 가족들과 아침인사를 하고 아침식사를 했다. 그렇게 얼마 안 있으니 한인회장님도 또 오셨는 것이다. 우리 가는 걸 보기 위해서이다.


어제 저녁에 왔던 문주씨도 나의 인사를 하기 위해서 학교가는 걸음에 왔는 것이다. 그런데 감동을 받았다. 문주씨가 목도리와 모자 양말 재혁이와 내것까지 그렇게 한세트씩 전부 챙겨왔는 것이다.


그리고 이곳에 와서 보지도 못하고 먹을 생각도 못했는데 묵을 챙겨왔는 것이다. 이것뿐만 아니라 마늘짱아지, 저녁에 이야기를 하다가 내가 북유럽 있는 쪽에서 쌈장하고 밥먹었는 이야기를 했더니 쌈된장까지 다 챙겨서 왔는 것이다.


너무 고맙고 미안했다. 그리고 낮선 외국에서 공부하는 동생들도 돌보고 공부하는 학생인데 낮에 점심이라도 사먹으라면서 봉투를 주는 것이다. 참, 내마음을 찡하게 했다. 한인회장님은 김밥을 챙겨오시고 목사님과 회장님 모두 고마우신 분들이다.


그렇게 출발 준비를 하고 출발했다. 파란하늘에 환한 태양은 비추지만 앞에서 불어오는 차가운 바람이 왜 그리 추운지 시간이 갈수록 더 춥고 거기에다가 콧물까지 연달아 계속 나오는 것이다.


몸은 움추려 들다 못하여 추위에 떨리기 시작했다. 빨리 해가 져서 스톱했으면 좋겠다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마음은 그랬는데도 5시가 되니 해는 지고 어둠이 몰려왔다. 그래도 멈추기 보다는 조금이라도 더 가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리고 잠자리를 구하기 시작했으나 노크를 했으나 계속 거절을 당했다.


그렇게 몇 번이나 거절을 당하다가 현지인 학생을 만났는데 자기 집에서 먹을 것이라도 먹고 가라는 것이다. 그리고 또 현지인분 집에 노크를 했더니 기다려 보라고 하시더니 우리의 숙식을 우리의 쉴 곳을 말해주시는 것이다. 계산할 돈까지도 주셨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 넓은 곳에서 편안하게 쉬면서 모처럼 만에 우리가 밥을 해서 먹기도 했다.


그런데 또 머리아픈 일이 출발하는데 생겼는 것이다. 독일 현대에서 전화가 왔는 것이다. 무조건 25000km 가 되기 전에 차를 지금이라도 반납하라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차 렌트내는 걸 비용을 주겠다 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어떻게 차를 렌트를 내야 되며 그 동안에 어디서 묵는다는 말인가. 그리고 부담해주겠다는 그 렌트비용으로써는 도저히 이번 종단, 횡단을 마칠때까지는 차를 렌트를 낼 수 없기 때문이다.


차 때문에 한숨 돌렸는 줄 알았더니 또 문제가 발생하니 참, 차 때문에 시작에서부터 끝까지 머리아픈 숙제가 되고 있다.





아일랜드 시각 2006년 11월 19일 일요일


- 승자와 패자는 누군가.


온도 6도, 종단거리 60.1km am 10:15 ~ pm 4:50


RIVER ROBE - BALLINDINE - BALLINDINE - MILLTOWN - CLARE RIVER - TUAM - GHAELTACHT


호스텔에서 준 아침을 먹고 폴리스가 와서 비옷을 입고 밖으로 나갔다. 그런데 얼굴에 닿는 바람이 너무 차가웠고 세찼다. 그렇게 출발을 하니 비는 쏟아지기 시작했다. 시작했는 30분도 안되어서 옷이 차갑다는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비옷이라 하면서 왜 이렇게 방수가 안되는 것이냐고 나 혼자 중얼거렸다. 점점 시간이 갈수록 옷은 더 차가워지고 바람을 동반한 비가 얼마나 세찬지 얼었는 얼굴은 너무 고통스러웠으며 눈을 뜨지 못해서 말 그대로 한치 앞도 구별하지 못한채 눈을 뜨지도 그 지경에서 흐릿하게 앞에 에스코트하는 폴리스 차를 가끔씩 보면서 겨우겨우 몇cm 몇 km 씩 뚷고 앞으로 나갔다. 휠체어를 앞으로 나가는 것이 힘겨워했다.


휠체어 의자 등받이가 뿌러질 듯 했다. 앞바퀴는 계속 들썩들썩 들렸다. 비옷에 스며든 비는 속에 있는 옷을 흠뻑 다 젖게했다. 온몸이 떨리고 한기마저 왔다. 어떻게 오늘 하루를 어떻게 견뎌낼수가 있을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다. 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갓길에 고여있는 비마저도 나로 향하여 다 날라왔다.


이정도 이면 얼마나 바람이 세다는 걸 어느누구도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나가는 차, 마주오는 차 모든 분들이 격려를 해주는 비바람 때문에 눈을 뜨지 못하니 제대로 답례도 할 수가 없었다.


비바람이라는 자연하고 휠체어 탔는 사람하고 어떤 목적을 두고 승부를 했으며 누가 승리했고 누가 패배라는 걸 할 수가 없다. 이것은 완전히 전쟁이였다. 폴리스마저도 4시가 넘으니 날씨가 너무 악조건이라서 멈추자고 했으며 잠자리까지 알아봐줬다.


아주 고급스러운 호텔이였다. 하루종일 비바람과 싸우고 얼은 몸을 따뜻하게 욕실에서 녹였다. 이것 보다는 얼마나 추위에 떨었는지 안에 들어오자 마자 눈이 부어오른듯한 걸 느낄 수가 있었다.


따뜻한 욕조물 안에 몸을 녹여서 그런건지 지금은 어느정도 정신이 드는 것 같다. 낮을 생각하면은 눈앞에 떠올리기만 해도 끔찍하다. 영화도 아닌데 왜 어떻게 날씨가 그럴 수가 있을까 얼마나 힘이 들었으며 낮에 그런 생각을 했을까.


최초인이 이렇게 힘이 드는 걸까. 사람들에게 희망을 주고 꿈을 이루는게 이렇게 힘이 드는걸까 하는 생각도 했다. 과연 어디까지 버텨낼 수 있으며 성공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도 한다.


그렇고 보니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듣고 있었던 이불에 핏자국이 있었다. 그것이 코피였다. 이제까지 힘이 들어도 코피한번 터져본 적이 없다. 미국과 일본 한국 그렇게 종단, 횡단을 했지만 코에 피가 터지는 것은 처음이였다.


얼마나 힘이 든지 나도 참 몰랐는가 보다. 더 이상 자연하고 전쟁을 하지 못하겠다. 오늘도 현지분이 후원을 했다. 성당에서 출발을 하는데 어제 봤고, 사진도 찍었다 하면서 후원을 해주고 가셨다.


거센 비바람 속에서도 차를 세우고 가지고 있는 돈을 다 잔돈까지 털어서 후원을 해주시고 가시는 분도 계셨다.





프랑스 시각 2006년 12월 23일 토요일


크리스마스 이브를 외롭게 보내지 마라고 우리에게 천사를 보낸 날이다.


온도 2도, 종단거리75.5km Am 10:20 ~ Pm 06:15


CAMBRAI - ST QUENTIN - LA PATURELLE - IGNIEL - BEAUVOIS EN CAMBRESIS - CAUDRY - INCHY - LE CATEAU CAMBRSIS - LANDRECIES - BAZUEL - CATILLON SAMBRE - CANAL DE LA SAMBRE AL OLSE - La Sambre - La Malassise - LE NOUVION EN THIERACHE - L'Ancienne Sambre - HIRSON


- CLAIRF ONTAINE


폴리스 에스코트를 받으며 숙소에서 출발했다 구름이 잔뜩 끼이다 못해서 안개까지 짙게 깔려있었다. 바람이 차갑고 너무나 추워서 도저히 견딜수가 없었다. 온도를 보니 2도였다.


이렇게 추워서 오늘 하루 어떻게 조정을 하나 몇분 앞 거리도 막막할 지경이였다.


몸은 움츠러들고 차가운 바람은 옷을 뚫고 들어오니 몸 안에 얼음이 스며드는 것 같았다.


이러고서야 어떻게 프랑스를 벗어날 수 있으며 피레네 산맥을 넘을 수 있을까하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그리고 크리스마스 이브 전날 이라고 오후 1시가 넘어서자 지역이 바뀌고 에스코트하는 폴리스도 파트를 이어 받아야 하는데 전부 휴가라서 연락이 되지 않았다.


우리끼리 오후를 보내야 했다. 근데 몇시간전에 빨간 차가 우리를 지나쳐 갔는데 앞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더니 차와 나를 세우고 돈도 후원해 주시는 것이 아니라 카드를 끊어주신 것이다. 추운데 집에가서 따뜻한 차도 마시고 가라는 것이였다.


난 도저히 추위에 견딜 수 없어서 따뜻한 집에서 몸도 녹이기 위해 그러기로 했다. 말그대로 집안은 아늑하고 얼은 몸을 녹을 정도로 따뜻했다.


서로가 언어가 되지 않아 2틀전에 신세를 진 연미씨가 생각이 나서 전화로 통역을 부탁했다. 하시는 말씀이 내일이 크리스마스 이브라서 가족들도 다 모이고 하니 같이 성탄절을 보내자는 말씀이였다. 생각해 보니 성탄절 이브인데 추운 길거리에 있는 것보다 현지분들하고같이 보내는 것이 좋을것 같아 기꺼이 응했다.


그렇게 생각하니 내일은 길거리에서 초라하게 보내지 말라는 뜻으로 천사를 보내주신것 같다. 고마운 마음을 가슴 가득히 받고 얼은 몸이 녹아서 횡단을 다 하고 6시쯤 돌아오겠다고 말씀을 드리고 다시 출발했다.


6시가 넘어 오늘 예상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래서 멈추고 차를 타고 돌아왔다.


우리가 떠나고 난 뒤 집 청소를 얼마나 깨끗하게 하셨는지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니 너무 정리가 잘 되어 있었다. 우리들을 기다리느라 저녁 식사도 안 하시고 식탁앞에서 잠이 들어 계셨다. 우리가 깨우니 일어나셔서 우리를 위해서 저녁준비를 손수 해주셨다.


음식을 먹기전부터 이야기를 나누었지만 한쪽은 한국어 한쪽은 프랑스어라서 말끼를 서로 못 알아들으니 답답해서 어쩔줄 몰랐다. 서로 눈치를 보며 몸짓으로 제스츄어를 취하고 했지만 이해가 안 되어서 한숨만 내쉬고 웃기만 하고 또 음식을 먹으며 몸짓으로 춤을 추고 온갖 태도를 다 취했다.


생각해보니 하늘에서 우리를 위해 천사를 보내주신 것 거듭생각을 했다.


그 추운 날씨에 지나가는 도로위에서 보시고 선뜻 집에서 몸을 녹이게 해 주시고 그렇게 모지라서 내일이 이브라고 가족들이 오붓하게 보내는 날인데 처음 만난 우리에게도 같이 보내자고 초청하는 그 마음을 헤아려 본다면 도무지 아무날 할 수 없는 마음이고 진정한 천사의 마음이 아닐까. 처음 본 우리들을 보고 어떤 마음이 들었기에 이렇게 배려를 해 주실까 라는 생각이 든다.


오늘의 불어 한마디


건배 - 샹떼


잘 자 - 본 누앙





프랑스 시각 2006년 12월 24일 일요일


일어나니 9시가 넘었다. 팡뚜왕 아저씨는 새벽같이 일어나셔서 먼저 식사를 하시고 우리 아침먹을 준비까지 다 해놓고 기다리고 계셨다. 씻고 준비하여 식사를 했다. 아침을 먹으면서 서로 언어가 안통하여 손짓으로 해도 안되어 종이를 갖다놓고 그림을 그리고 온갖 짓을 다 했다.


그렇게 다 먹고 난 뒤, 팡뚜왕 아저씨와 같이 집 밖에 나가 직접 키우시는 시베리안 허스키 개도 구경하고 선영이와 재혁이는 연못도 보고 오리도 보고 했다. 나는 그 틈에 잠깐 밖에 나가 산책을 몇 번 돌고왔다.


공기는 차가웠지만 상쾌했으며 도로는 지나가는 차가 없어서 너무 한가로웠다. 그러다 보니 몸도 춥고 하여 돌아왔다. 마당에 들어서자 마자 옆에 창고에 무슨 소리가 나서 가보니 아저씨께서 겨울을 나기 위해서 나무 장작을 쌓아놓은 곳에서 재혁이와 선영이는 나무 땔감을 도끼질을 하고 있었다.


나는 나무꾼이 왔는 줄 알았다. 두 사람이 도끼질이 서툴러서 직접 아저씨께서 시범을 보여주시기로 했다. 그러고 난 뒤 통나무들을 집안으로 옮기고 벽난로에 큰 장작을 밀어넣었다.


팡뚜왕 아저씨는 점심식사를 준비하시고 선영이와 재혁이는 그 나무 장작이 재미가 있었는지 하루종일 들락날락하였으며 밤에도 나무를 둘이 들고 들어오고는 했다. 아침먹었는것도 소화되지 않았는데 점심을 준비해주셔서 그것까지 먹고 또 서로 몸짓으로 대화를 나눴다.


나는 모처럼만에 낮잠을 잤다. 그리고 난 뒤 6시가 넘어서니 아저씨의 작은 딸과 친구들, 가족들이 왔다.


처음에는 우리들을 보고 낮설어 했는데 아저씨께서 다 설명을 해 주셨다. 다 같이 크리스마스 이브에 저녁을 하면서 사진도 찍고, 캠코더로 촬영도 하고 하루종일 아저씨가 음식 준비를 하셨는데 그것이 계속 다양하게 나왔다.


술도 먹고 또 서로 언어가 안통해서 답답한 표정도 지었다. 그렇지만 신나게 놀았다. 우리도 선물도 받았다. 아기예수가 태어났는 기념으로 낮선 외국에서 좋으신 분을 만나 너무 재미있게 놀았다.


아저씨 작은따님한테 프랑스식으로 진한 인사도 받았다. 지금은 다 돌아가고 잘 준비를 하고 있다.





프랑스 시각 2006년 12월 25일 월요일


- 소 떼들의 반란


온도 -2도, 종단거리82.1km Am 11:30 ~ Pm 07:00


Laurembert - ANY MARTIN RX - ANY MARTIN RIEUX - CHAMPAGNE ARDENNE - AUGE - MON IDEE - MAUBERT FONTAINE - TREMBLOIS LES ROCROI - LE PLQUET - RIMOGNE - LE PAVE - LONNY - LE BOIS DE LA LOGE - CLIRON - WARCO - CHARLEVILLE MEZIERES - VILLERS SEMEUSE - LES AYVELLES - ELAIRE - LE SOUMIL - FLIZE - DOM LE MESNIL - PONT BAR - DONCHERY - LA MEUSE - METZ - DOUZY


어제밤에 자기 전에 아침에 일찍 일어나겠다고 마음먹었는데도 또 일어나보니 9시가 다 되었다. 서둘러 준비를 하였고 아저씨는 어제에 이어 또 아침준비를 해 놓으셨고 또, 먹을 음식을 잔뜩 사서 주셨다.


식사를 마치고 마당에서 기념촬영도 하고 너무 아쉬운 작별의 인사를 나누었다.


그리고 아저씨께서는 오늘 날씨 기온이 영하로 내려갔으니 몸을 따뜻하게 하라고 염려까지 해 주셨다. 차를 타고 멈추었는 곳에서 출발을 하는데 안개가 있어 앞을 잘 분별할 수가 없었다.


이래서 오늘 횡단, 종단을 안전하게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 더 쉬었으면 좋겠다고 말을 했다. 그러다 보니 목적지에 도착했고 차에서 내리기가 왜 그렇게 싫었다. 그래도 내려보니 날씨가 영하로 내려갔다는 걸 실감할 수가 있었다.


이래서 오늘 하루를 견딜수 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서 한국에서 이선생이 보내준 열조끼까지 입고 출발했다. 그런데 길에 풀들이 얼어 있었다. 밤에 서리가 내려 얼었다고 생각했는데 계속 그것이 이어져서 이상하여 자세히 살펴보니 밤에 눈이 내렸다는 걸 알수가 있었다.


점점, 갈 수록 눈내렸는 자국이 눈에 들어왔다. 그리고 크리스마스라서 길이 너무 조용했다. 그런데 에피소드가 일어났다. 오후에 들판을 지나가는데 추운날씨인데도 불구하고 소들이 풀을 뜯고 누워있었다.


그런데 내가 지나가니 누워있던 소들도 같이 일어나라 소떼들이 달려서 따라왔다. 그런데 일이 벌어졌다. 들판의 철조망이 툭, 터지면서 소떼들이 밖으로 나와 길거리에서 소 떼들이 우왕자왕하니 지나가는 차들도 다 서버렸다.


소 떼들은 5차선위로 차를 다 막았다. 소 주인들은 누군지도 모르겠지만 나오지도 않았다. 우리도 한참 보다가 갈길이 바쁘다 보니 우리가 있어도 무슨 해결이 나겠는가하면서 그냥 갔다.


아참, 그리고 소 몇 마리는 내가 휠체어로 하고 하니 한 옆으로 소들이 들어와 그렇게 우리 가는 방향으로 출발을 하다가 운전사들이 연락을 하여 난리가 났다. 그래서 폴리스차들이 출동하는 것을 볼 수가 있었다. 우리가 떠나고 난 뒤 소들이 안전하게 주인을 찾아가고 진압이 되었는지 모르겠다.


그놈의 소들이 왜 나를 보고 따라와 그것까지는 좋은데 철조망까지 뜯어버리고 차도위를 진입했는지 모르겠다. 완전 소떼들이 오늘 반란을 일으켰다.


난 소들을 보고 하루종일 추위하고 싸우고 얼은 몸을 잠깐 잊을 수가 있었다.


소들이 내가 그렇게 좋았는지 모르겠다.


밤이 늦도록 조정을 했으며 깜깜해지는 어두운 밤을 달리니 초생달이 어느새 하늘에 떠서 나의 가는 길에 같이 동행을 해 주었다.


또, 거리에 오늘 마지막 크리스마스 불빛이 나를 비추어주었다.


그런데 길을 타다 보니 고속도로가 걸려버렸다.


돌아가는 길도 없고 그 어두운 밤에 고속도로를 계속 탔는데 운 좋게도 크리스마스라서 차가 별로 없었고 신고하는 사람이 없어서 고속도로를 달리는데도 재재하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고속도로를 다 타고 나니 누군가가 신고를 해서 엠블란스가 따라와서 길을 막았고 폴리스가 올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그런데 얼마뒤 폴리스가 왔지만 우리의 설명을 듣고 별 말이 없었고


무료로 잠자리까지 준비해주었다. 지금 쉬고 있는 숙소는 프랑스에서 공부를 하는데 집이 없는 학생들을 위해서 무료로 잠자리를 제공해주는 곳이다.


프랑스 사람은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외국인공부하는 사람들도 쉴곳이 없으면 여기서 다 머문다고 한다. 시설이 너무 깨끗하고 좋다.


우리는 늦게 왔는데도 저녁까지 다 준비해 주셨다. 지금 다 씻고 잘 준비를 한다.


프랑스어 한마디 친구 - 아미


잘자 - 봉느와





스페인 시각 2007년 2월 2일 금요일


온도 6도, 종단거리 49.5km A.M 10:30 - P.M 6:30


ESPINAL ~ GERENDIAIN~ ERRO ~ AGORRETA ~ ZUBIRI ~ ZABALDIKA ~ HUARTE ~ PAMPLONA


우리가 쉬었던 곳은 아침 8시가 되면 자리를 비워줘야 되는 곳이었다 알고보니 순례자들이 쉬어가는 곳이었다. 그리고 내가 어제 넘었던 곳이 순례자의 길이었다. 한국분이셨던 분의 직업은 신부님이셨다. 우리는 충전해서 밧데리도 차에 다 실고 나는 세수도 못하고 눈꼽도 떼지도 못한체 부스스하게 차를 타고 휠체어를 두었던 폴리스에 왔다. 그 앞으로 만났던 신부님도 지나가는 길이어서 컵라면도 드릴수 있었다. 그렇게 어제 하루종일 굶었던 배를 컵라면으로 대신하고 출발했다. 어떻게 저 눈길을 헤치고 산을 내려 갈까 하는 생각밖에 없었다. 밤에 잠을 같이 잤던 성직자분들을 도중에 마주쳤다. 반갑게 웃으면서 인사를 나누었다. 그런데 나는 산을 내려가는줄만 알았는데 왠지 알게모르게 오르고 있는것이다. 900m가 넘는 고지라는 표지가 나왔고 그것보다 더 높이 올랐는데 거기는 표지판이 나오지 않았다. 오늘은 이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내가 또 죽다가 살았는것이다. 이때까지 위험을 겪었던것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어떻게 되었는 일인가 하면 이곳까지 타고왔는 휠체어라서그렇는지 요즘 계속 앞바퀴가 떨려서 타는데 어려움을 겪고있는것이다. 바퀴 갈았는데는 이틀밖에 되지않았는데도 벌써 닳아버렸는것이다. 그 높은 산을 내려오면서 떨리는 바퀴에만 신경을 쓰다보니 갑자기 바퀴가 더 크게 떨리는 바람에 나도 모르게 입에 물고 있던 조종기 막대기가 놓쳐버렸는것이다. 아무리 다시 입으로 잡아물려고 했지만 되지 않았고 순식간에 휠체어가 다른쪽으로 굴러가버린것이다. 진짜 절벽이었다. 그런데 또 한번의 피레네 산맥의 신께서 도와주셨는지 아직까지는 하늘나라 가지 마라는 운명인지 큰 나무에 걸려서 휠체어와 나는 절벽으로 떨어지지 않았는것이다. 기사님과 지해는 차를 멈추고 뛰어 내려왔지만 속수무책이었다. 그 가파른 길을 내려오는 다른 차들도 우리 차 때문에 서 있었고 하이킹하는 분들도 멈추고 휠체어와 같이 쳐박혀 있는 나를 꺼내는데 도와주셨다. 그렇게 나오면서 돌아보니 참 끔찍했다. 그 나무에 걸리지 않았다면 나는 이 피레네 산맥 깊은 곳에 떨어져 있을지도 모른다는 그런 생각을 하게 되었다. 지나가던 현지인분들도 차를 세우고 내가 크게 다쳤는줄알고 못움직이게 하시고 119를 부르고 경찰을 부르고 난리가 났다. 나는 괜찮다고 했지만 못움직이게 하여 어떻게 할 수가없었다. 그렇게 119도 왔지만 언어가 통하지 않아서 어떻게 표현할수가없었다. 현지분에게 전화를 빌려 우리 대사관에 연락하여 통역도 부탁하여 겨우겨우 나는 움직이지 못하다가 휠체어에 앉을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처음봤는 동양인일텐데 현지분들이 나를 대해주시는 마음이 너무 감사했고 나는 어떻게 표현할수 없는 감명을 받게 되었다. 몸이 다치지 않았다.


얼굴과 이마에 약간의 상처가 있었지만 그렇게 죽다가 살아나서 다시 출발했다. 그래도 바퀴가 너무 떨려서 잠깐 세워놓고 확인해보니 닳았는 바퀴가 언제 어느때 터질지 모르는 지경이었다. 가던것을 멈추고 산중턱의 작은 마을에서 고치기 시작했다. 한시간 넘게 걸렸다.


그렇게 수리하는 시간동안에 이것저것 생각해 보니 참 기가 막혔다. 겨우 수리를 다 하고 또 출발했다 그렇지만 떨리는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런데 자꾸 절벽으로 휠체어가 굴러갔는것이 눈앞에 떠올랐다. 지금은 대사관에서 말해주신 우리를 위해서 주선을 해 주셔서 태권도장 관장이신 한인분 체육관에서 하룻밤 쉬게 되었다. 기사님은 낮에 사고났는 깃발과 그런것을 조금전까지만 해도 바깥에서 수리하고 계셨다. 그런데 한가지 몰랐던것을 알게 되었다. 관장님이 말해주시는데 국경선에서 오늘 이곳까지는 바스크라는 작은 나라였다고 한다. 지금은 스페인이지만...그래서 아직까지 스페인기를 달고 다니면은 안좋아 하는 사람들이 더욱더 많다고 하셨다. 나는 다 스페인국가인줄 알았는데 이렇게 모르고 있었던것을 또 하나 알게 된것이다.


오늘의 스페인어


감사합니다. - 그라시아스


대단히 감사합니다.- 무챠스 그라시아스


화장실이 어디입니까? - 돈데 에스 엘 바뇨




모로코 2007년 4월 18일 수요일


온도 18도 종단거리 48.3Km AM9:00 - PM4:00


oued lahlou~oued ghrifa~briech~pont mohamed v~oued tahadart~gueznaia~oued boukhalef~tanger


지금 몹시 피곤하고 이상한 기분으로 쓸려고 하고 있다.


차에서 자고 아침을 먹지도 못한 채 9시가 되어서 출발을 했다.


어젯밤에 이어 계속 바람이 앞에서 불어오니 너무 힘들었다. Tanger라서 바다가 가까워져서 바람이 세찬 것인지..그러고 보니 양쪽에 나무가 한 방향을 굽어서 자라고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보니 바람이 너무 세차게 불다보니 그 영향으로 그런 것 같다. 나무도 휘게 하는 그 바람을 몸으로 맞으면서 떠나기 아쉬운 모로코 Tanger까지 도착했다.


어제저녁은 라면으로 아침이고 점심이고 구경도 못하고 배가 너무 고파서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마켓에 들어가서 피자와 샌드위치로 세 사람이 허기진 배를 면하고 오늘은 일찍 쉬고 내일 스페인으로 들어가기로 결정하고 숙소를 구하기 위해서 4시쯤에 경찰서에 도착했다.


그런데 기다리라고 한 것이 5시간이나 넘게 그 길거리에서 나는 휠체어를 탄 채로 바람을 맞으면서 기다리고 있었다. 높은 사람한테 곧 답이 내려올것이라는 말만하고 밤9시가 넘어도 아무런 답이 없는 것이다. 현지인 경찰들이 꼭 우리에게 숙소를 제공해주라는 원칙은 없다. 그러나 나를 제일 화나게 한 것이 5시간동안 기다리게 하고 제공을 해주겠다 주지 않겠다는 확신을 주지 않고 장애인을 무작정 기다리게 한 것이다.


그것이 화를 터뜨리게 한 것이다. 상환이는 지쳐서 그냥 배타는 곳까지 가자고 조르고 하여 화가 폭발이 난상태에서 참을수가 없어서 뒤돌아 설수가 없었다. 그래서 도로에 오는차도 다 막아버리고 경찰서앞 가드레일도 전부 휠체어로 박아서 길바닥에 내팽겨치고 그것도 모자라 경찰이 와서 세우는 것을 경찰한테 다 두드려 박아서 경찰은 가드레일에 박히게 되었다. 근처에 현지인들도 놀라서 다 뛰어나와서 무슨일인가 묻기도 했다. 그 사정을 알고 경찰이 나쁘다고 우리편을 들어주었다. 모로코를 마지막으로 떠나기 때문에 나는 그만 참기로 하고 상환이에게 배가 있는 부두로 가자고 했다. 우리차 시동을 켜고 가려고 하는 찰나에 경찰서에서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나오는 것이다. 나는 그것을 보고 곧 뒤따라 갈테니 우리차는 먼저가라고 말을 했다. 그리고난뒤 세워놓은 가드레일을 밀고가서 둘러 쳐박아 버렸다. 그 높은 사람도 가드레일에 부딪혀 아파서 어쩔줄을 몰라했다. 그러나 나에게 뭐라고 계속 대항을 했으면 나는 참지못하고 끝까지 했을 것인데 그 경찰들이 대항을 하지 않아서 물러설수가 있었다. 근데 배있는 부두로 가다보니 시간이 밤 10시가 넘어버렸고 다들 씻지도 못하고 차에서 밤을 지새웠는데 또 이틀이나 그렇게 할 수가 없어서 없는 돈이지만 숙소를 구하기로 했다. 그래서 호텔을 찾아 들어왔는데 밤 11시가 이미 넘은 상태이고 너무 억울하고 분통이 터진다. 우리에게 확실하게 된다 안된다는 답을 줬으면 4시가 돼서 우리 스스로 숙소를 구해 들어와 쉬고 지금은 잠자리에 있을 시간인데 말이다. 그렇치만 모로코를 돌면서 수많은 현지인과 좋은 경찰분이 있었기 때문에 오늘의 일은 옥에 티라고 생각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모로코에 대한 좋은 마음은 잊을 수 없을 것이다.


오늘의 모로코 한마디 :금-마하브, 은-노크라




프랑스 2007년 5월 15일 화요일


온도 22도 종단거리 65.5Km PM2:00 - PM10:10


canal du midi~ pouzols monervois~ cabezac~ la cesse~ cruzy~ la croisade~ capestang~montady~beziers


내 스스로 생각해도 지독한 사람이다. 아침에 일어나 차 속에서 바지를 입고 휠체어를 타는데까지는 좋았다. 추워서 위에 잠바를 입을려고 했다. 요즘 계속 팔이 더욱더 경직이 되어서 오늘도 잠바를 팔에 끼었는데 펴지지 않아서 상환이한테 힘껏 당기라고 했다. 그러는 순간 팔은 펴지지 않고 몸과 휠체어가 같이 휘청거렸다. 그 순간 아픈 허리가 삐그덕 하는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리고 난뒤 허리가 아파서 몸을 움직일 수가 없는 것이다. 왼쪽 다리마저도 발목까지 당기고 도저히 어쩔수가 없었다. 휠체어 조정하는 것이 도저히 자신이 없었고 엄두가 나지 않았다.


그래도 다리밑에 계속 있을 수 없어 움직여보려 했지만 조금이라도 몸을 움직이면 허리가 부러지는 고통이 있어 입이 벌어졌다 다물어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움직이지도 못한 채 시간은 계속 흘러만 갔다.


11시가 넘고 12시가 넘었다. 마을이 작아서 숙소도 없기 때문에 그 자리에 계속 있을수도 없고 참 난감한 일이었다. 그래서 조금이라도 움직여 숙소가 있는 마을까지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차가 먼저가고 겨우 휠체어를 조정하면서 뒤따라 가봤지만 몇미터도 가지도 못하고 멈추어 버렸다. 도저히 너무 아파서 조정할 수가 없었기 떄문이다. 먼저 간 차는 저만치서 서있고 상환이가 나를 데리러 왔다. 차 있는 데까지 나를 데리고 갔지만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마냥 아픈 나를 옆에서 지켜보는 것도 그렇고 하여 차안에 들어가서 아침 겸 점심밥을 먹으라고 했다.


그렇게 허리 때문에 움직이지도 못하고 오도 가도 못하고 있는데 얄미운 비구름과 바람이 내 머리 위로 와서 뿌리고 옷마저 다 젖게 했다. 진짜 심술꾸러기 비바람이었다. 시간을 보니 오후2시가 되었다. 도저히 길거리에서 뭐하는 모습인지 모르겠다고 생각하며 조금 움직일 수가 있어서 숙소가 있는 마을까지 가기로 했다.


너무너무 고문이었다. 휠체어고 조정기고 다 내던지고 아이스팔트 위에 그냥 뻗고 싶었다. 그렇게 고통을 이겨내면서 몇분갔을까? 내 앞에 저만치서 현지분이 차를 세우고 나를 기다리고 있는것이다. 그까지 겨우가서 아프지만 지나칠수 없어서 멈추었다. 내모습을 감격하고 선물까지 주시는 것이다. 너무 아파서 웃는것도 힘들었지만 겨우 흉내를 내면서 기념사진도 찍었다.


그리고 난뒤 내가 허리 아픈 이야기를 했더니 갑자기 나에게 무엇을 해도 되냐고 하시더니 내아픈 부위에 손을 가만히 대고 있는 것이다. 알고봤더니 우리나라처럼 아픈 부위에 기를 불어넣어주는 것이다. 그리고 난뒤 한참동안 나에게 해주시더니 허리와 배에 오염이 많이 되었다고 물을 많이 먹으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우연히 길에서 만나신 분이 선물도 주시고 나를 치료해 주실라고 애를 써 주셔서 그 정성을 져버리지 못하여 나는 조금 나아졌다는 모습으로 또다시 겨우 출발을 했다.


지인이한테 숙소가 있을 도시까지 갈려고 하면 몇 킬로까지 가야하느냐고 물었다. 근데 1~2킬로도 아니고 50킬로라고 하는 것이다. 그렇치 않아도 눈앞이 캄캄한데 주위가 보이지 않았다. 어떻게 조정하여 갈수가 있을까 차안은 짐이 너무 많아서 휠체어를 도저히 실을 수도 없는 상황이고 이렇게 무식하게 고집으로 밀고가다가 허리가 더 심해서 내일 당장 일어나지 못하면 어쩌나 하는 생각이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머리안이 완전 깜깜해 지는것 같았다.


나는 한번 아픈 것이 도지면 한두달이 아니고 일년이 넘게 고생을 해야되서 만약에 그렇게 된다면 이 낯선 유럽에서 속수무책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도로 한가운데서 가만히 있을 수는 없는 것이다. 또 내일도 모르고 어떻게 될 때 되더라도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하면서 이를 악물고 눈에서는 별이 왔다 갔다 하는데도 조정하기 시작했다.


근데 쭉뻗은 도로를 가는데 아픈 고통을 잠깐 잊고 자연에 도취가 되었다. 무언가 하면 길가의 양쪽에 가로수들이 서로 마주보면서 손을 잡고 초록색의 터널을 만드는 것이다. 그속을 내가 통과하기 때문이다. 더 자세하게 설명하자면 녹색의 터널이 두 개였다. 내가 지나가는 길에도 가로수가 터널이 만들어져 있었고 오는 길 옆으로는 강이 있는데 그 강가에도 가로수들이 손을 마주잡고 터널을 만드는 것이다. 내 전동이 배였다면 아스팔트가 아닌 그 강위를 푸른녹색의 터널을 보면서 통과했을 것이다. 여튼 한마디로 너무 표현할 수 없는 자연의 만든 모습이었다.


아파서 다 죽어가는 사람이 이런것까지 느꼈다니 참 내 스스로도 이해가 되지 않는 사람이다. 이렇게 사경을 헤매면서 목적지 도시에 왔다. 근데 숙소를 구하려고 해봤지만 전부 풀이었다. 오늘이 화요일인데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큰도시 근교로 빠져나오자고 했다. 그렇게 빠져나와보니 해는 벌써 지고 밤 10시가 다되었다. 겨


우 호텔이라는 글자가 몇 군데 보여 찾아갔지만 그것도 방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한탄했다. 너무 아파서 정신이 없고 돈 주고 숙소를 잡으려고 해도 안되니 도저히 어떻게 되는 건지 모르겠다. 또 낮에 이어 길가는 프랑스 현지인분이 아주머니2분이 차를 타고 지나가시다가 우리에게 도와줄 것이 없느냐고 다가오는 것이다. 그래서 취지를 설명하고 숙소도 안되니 혹시 캠핑장이 어디쯤 있느냐고 물었다. 그러나 시간이 너무 오래되서 그것도 문을 닫았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정 잘 곳이 없으면 그 분들 집에 하룻밤 쉬고 가라고 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너무 고맙고 감사했지만 문제는 휠체어를 실을 수가 없는 것이다.


그리고 이분들 집도 20킬로나 떨어져있는 상태고..그분들 차에 휠체어를 실어보려고 했지만 차가 너무 작아서 도저히 실을 수가 없는것이다. 그분들이 우리를 도와주고 싶어서 여기저기 연락을 하고 신경을 쓰시는 것이다. 우리도 고마움을 전달하기 위해 프랑스에서 만난 박연미씨에게 전화를 하여 통역을 부탁했다. 그래서 결론은 휠체어를 어디 맡기고 그 현지분댁에 가기로 했는데 도저히 휠체어를 맡겨둘 곳이 없었다. 그래서 기다리라고 하시더니 두분이 차에 타고 어디론가 가시더니 몇 분 뒤에 오신 것이다. 뒤편에 비어있고 가격이 저렴한 호텔이 있다고 가자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따라갔다. 근데 그 숙소는 계산을 카드로 해야 되는 것이었다. 그분들은 카드로 대신해줄테니 돈만 내면 된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그분들이 카드로 계산하고 우리는 돈을 냈더니 받지 않으시고 우리주머니에 돈을 넣어 주시면서 괜찮다고 잘자라고 하시면서 감동받았다는 눈빛을 해주시고 돌아가시는 것이었다. 우리는 너무 고맙고 몸둘 바를 몰라서 바깥까지 따라나와서 인사를 드렸다. 지금 앉지도 못하고 누워서 일지를 쓰는데 혹시 내일 아침이 되었을때 조금이라도 나아지지 않는다면 나는 어떻게 대책이 없다.




프랑스 2007년 5월 16일 수요일


밤에 이상한 꿈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도 기분이 개운하지 못했다.


꿈속에서 갑자기 내 이가 몽땅 빠져 입안에 고여있었기 때문이다. 지금 이렇게 쓰면서도 되새겨보니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끔찍할 수 없다. 근데 허리를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만을 바랬는데 일어나보니 계속 움직일 수 없었고 고통이 더 심했다. 나는 대책이 없어서 별 생각을 다했다. 한국으로 돌아갈까? 이렇게 앉을 수도 없는데 비행기를 탈까...두 애들을 먼저 보내고 한국에서 가능한 사람을 오라고 할까 하면서 별 희안한 생각을 다했다.


다들 대책이 나오지 않고 움직일 수도 없어서 어제는 현지분이 도화주신 덕분에 하룻밤 잘수 있었지만 오늘은 허리가 아픈 관계로 하루 더 묶기로 하고 계산했다. 지금 감을 잡을 수가 없다. 허리가 좀 나아지는 건지 내일 아침까지 차도가 보이면 횡단을 중단하고 대안을 내어봐야겠다. 지금 몸을 조금만 움직여봐도 숨이 멎을 것 같이 아프다.




프랑스 2007년 5월 17일 목요일


지금심정은 너무 암담하다. 밤에도 허리고통이 너무 심해서 하늘나라 문턱까지 갔다오는 줄 알았다. 지금 꼬박 3일째다. 일어나서 앉지도 못하고 누워있어도 지금 고통에 시달리고 있다.


숙박비는 계속 나가고 답이 보이지 않는다. 밤새 고통에 시달리다가 아침에 애들을 일찍 깨워서 대안을 논의 해봤으나 아무 결과가 나오지 않았다. 한국에 전화를 해보았지만 그것도 속수무책이었다. 위가 너무 안 좋은것 때문에 누워서 뭘 먹을 수가 없어 상환이와 지인이는 아침부터 나가서 애기들이 먹는 이유식을 겨우 구해왔으나 그것도 도저히 먹으려고 해도 내입맛에 안맞은지 도저히 먹을 수도 없고 여하튼간에 이렇게 마냥 누워있을 수도 없고 지금 미칠 지경이다.


경비라도 넉넉히 있으면 하루하루 있는것도 애가 덜 탈텐데 지금 아파서 죽으면서도 피가 바짝바짝 말라 들어가는 것같다. 이제 도저히 아파서 못 적겠다.




프랑스 2007년 5월 18일 금요일


나는 조금이라도 낫기를 바랬는데 밤새 너무 아파서 잠을 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날이 밝자 결단을 내렸다. 한국으로 돌아가는 걸로..지인이와 상환이는 2주 동안 프랑스에 있어라는 이야기를 하고 한국에 돌아가서 2주만 치료하면 웬지 나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한국에 연락을 했는데 더욱 더 답이 없는 결과가 나왔다. 비행기에 환자가 누워서 가게 되면 500만원이며 나 혼자 갈수 없고 보호자까지 동반해야 된다는 것을 ..그렇게 되면 돈이 700이 넘게 드는 것이다. 그걸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또 한국에서 다시 오게 되면 또 드는 비용, 보조하는 사람이 오는 비용이 1000만원이다. 지금 주머니를 다 털어도 이 돈으로는 독일까지 못가는 금액인데 참 눈앞이 깜깜하여 답은 영영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생각한 것이 대사관에 이야기 하고 한인회에 이야기를 하여 치료받는 쪽으로 알아보기로 했다. 다행히도 침놓는 곳을 알아봐주셨다. 베지에의 이원식 사범님이 연결이 되어 날 침놓는 병원까지 데려가기 위해서 우리 숙소로 오셨다. 사범님과 같이 가보니 프랑스분이 운영하시는 한의원이었다. 연세가 많으시고 원장님이셨다. 나에 대해서 설명을 해드렸더니 무료로 침을 놔주시고 치료도 해주셨다. 그리고또 원장님께서 불어로 한 말씀하신 것을 적어보겠다. 지금 내게 있는 보석이나 금,은은 나에게 소중하지 않다. 내가 죽게 되면 없어져 버릴 것이기 떄문에..그래서 나를 무료로 치료도 해주시고 또 안 좋아지면 언제든지 오라고도 말씀해주셨다.


나는 치료를 받고 관장님께서는 나를 또 숙소로 데려다 주셨다. 행사준비 때문에 바쁘실텐데 앉으시지도 않으시고 곧장 돌아가셨다. 조금 전에도 시간이 늦었는데도 내가 치료받은 곳이 좀 차도가 있는지 걱정이 되어서 전화까지 해주셨다. 침을 맞고 나니 움직이는 것은 많이 부드러워졌다. 내일 아침에 자고 일어나서 앉아보고 앉을 수 있으면 횡단을 시작하고 아니면 아직 모르겠다. 지금 한국에서는 새벽 5신데 걱정이되서 전화도 오고했다.




프랑스 2007년 5월 19일 토요일


온도 30도 종단거리 76Km AM11:00 - PM9:50


l'herault~agde~sete~balaruc les bains~frontignan~montpellier


나는 5일동안 바닥도 보이지 않는 절벽 끝으로 떨어지고 있었다는게 표현이 정확할 것 같다. 어제 침을 맞았기 때문에 아침이 되자 앉아보는 것부터 먼저 시작했다. 근데 앉아있을 수가 있었다. 그래서 준비를 하고 밥을 먹고 출발하기로 했다.


그래도 움직이는데는 조금 부드러워졌지만 그래도 불편했다. 전동휠체어에 모처럼만에 겨우 앉았다. 그래서 나는 어제 도와주신 관장님과 나를 치료해주신 프랑스 한의사원장님께 마음속으로 감사하는 인사를 드리면서 출발을 했다.


근데 전동휠체어의 속도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내 몸이 말을 듣지 않았기 때문에 속도를 제대로 내지 못했던 것이다. 그런데 생각지도 않은 비극의 싹이 트고 있는 것 같았다. 그게 뭐냐하면 왼쪽 골반이 아파오기 시작했다. 발에서부터 종아리까지 땡기는 것이다. 바로 미국에서 치료하다가 고생했던 그 곳이 도지는 것 같았다. 진짜 미국에서 아팠던 것을 생각하니 눈앞이 캄캄하니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것 같았다. 진짜 도저버리면 속수무책인 것이다. 비행기를 탈수 없으며 여기서는 치료도 못받고 하늘나라로 직행해야 되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휠체어를 타고 출발했으니 가는 데까지 가보자고 결심을 했다. 그리고 길도 양방향 일차선이라서 조금만 가다보면 차가 꼬리가 보이지 않게 길게 트레픽이 되어서 갓길이 나오자마자 멈춰야했다.


그렇치만 그것이 내가 숨을 쉴 수 있는 기회였다. 골반이 너무 아파서 조정하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차가 얼마나 많이 밀려있는지 그것이 다 빠져나갈때까지 기다리는 시간이 몇 분이 아니고 오래됐기 때문에 나는 가는 목적지가 시간이 많이 걸릴 줄 알았지만 그렇게 쉬는 시간이 나는 안도의 숨을 쉬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오늘 하루 종일 몇 번이나 반복해야했다.


근데 오후가 접어들자 그렇게 고통스러운 골반의 정신을 잠깐이라도 다른 쪽에 돌릴 수 있게 되었다. 바로 프랑스의 해변이 펼쳐진 것이다. 모래사장에 비키니 입은 가족들도 5월달인데 나와서 썬팅을 하고 연인들은 밀려오는 바닷물에 나란히 거닐기도 했다. 그리고 문화가 달라서 그런지 썬팅하는 아가씨가 있었는데 노출이 눈뜰 수 없을 만큼 심했다. 그 외에는 설명을 도저히 못하겠다. 그리고 해변에 갓길에서 캠핑카가 줄을 이어 주차해 있었다. 그렇게 한 시간이 넘게 달려서야 그 해변가를 벗어날 수 있었다. 거기다가 갈매기까지 한 몫하여 아픈 나의 정신을 그쪽으로 잠깐이라도 도취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자전거를 타고 하이킹경기를 하시는 분도 응원을 해주시고 피크닉오신 분들도 나에게 격려와 응원을 해주셨다. 그렇게 몽뺄리에를 접어들수가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옆에서 승용차가 비상깜빡이를 켜고 나타나는 것이었다. 그것은 바로 한인분이셨다. 우리를 마중나온 것이었다. 목적지까지 에스코트를 해주셨다. 근데 도착해서 보니 마중나오신 분이 한인회 회장님과 총무님이셨다. 우리를 위해서 준비해주신 숙소 앞에 오니 한인분 20여명이 넘는 분들이 우리를 반겨주기 위해서 기다리고 계셨다. 그리고 천사와 같은 아이들도 많이 나와 있었다. 그래서 로비에 들어서니 다과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래서 나는 간단하게 우리 소개를 하고 인사를 했다. 근데 하루 종일 아픈 고통을 잊게 해주었다. 바로 한인학교 학생인 꼬마어린이들이 나를 위해서 그림을 그려서 선물로 준 것이다. 얼마나 좋은지 몰랐다. 거기다가 고사리 같은 손으로 글자가 적힌 학까지 주니 귀한 선물이었다. 어떻게 고마움을 표현할지 모를 정도였다.


한인분들은 나에게 몇 가지 질문을 한 뒤 피곤하다고 일찍 쉬어야 된다고 하면서 우리를 숙소 방안으로 올라가도록 하시는 것이다. 근데 방안에 들어오니 우리를 위해서 또 한인회 총무님 사모님께서 음식을 손수 준비해오셔서 식탁위에 펼쳐놓은 것이다. 보쌈에다가 동그랑땡과 숙주나물, 샐러드, 오징어국 등 거기다가 와인까지 준비해주시고 내일 아침까지 오신다고 말씀하시고 돌아가셨다. 상환이는 아침 점심도 밥을 못먹은지라 밥을 보더니 정신이 없어졌다. 그렇게 셋이 먹고 와인도 곁들이고 차안에 있는 맥주까지 들고 와서 한잔씩 더했다. 이까지는 좋았으나 골반 아픈 것이 너무 걱정이 되어 새벽1시가 넘었는데도 한국에 호출을 했다. 여기서 더 심해지면 어떻게 걷잡을 수 없는데 어떻게 하면 좋은지 좋은 생각 있으면 말해보라고 했다.


그렇지만 속수무책이었다. 나는 그래서 마음속으로 기도할 수 밖에 없다. 제발 골반이 도지지 않기를...베를린 장벽이 눈앞에 보이는데 제발 이렇게 고통이 가라앉기를 바란다고 신에게 빌 뿐이다.




프랑스 2007년 5월 20일 일요일


온도 28도 종단거리 86.5Km AM11:30 - PM5:30


le cars~ le salaison~ vendargues~ st aunes~ baillargues~ luner-viel~ luner~ codognan~ zone industrielle de bernis~ nimes


나는 술도 한잔 하고 잠자리에 들었지만 허리와 골반고통은 여전해서 잠을 잘 들지 못했다. 아침이 되었는데도 걱정이 되었다. 골반상태가 더 심해지면 어떻게 하나 하는 그 고민뿐이었다. 한국의 사무국장한테 또 전화가 왔지만 좋은 방법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보니 한인회 목사님과 회장님, 총무님도 우리에게 아침인사를 하러 오셨다. 나는 회장님께 미안한 부탁을 해보았다. 허리와 골반이 너무 아프니 병원에서 진통제라도 맞을수 있느냐고. 한인회장님께서는 여기저기 다 전화를 해보았지만 오늘이 일요일이고 문 여는 병원도 없고 특히 보험증이 없기 때문에 응급실에 가도 줄을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하셨다. 그렇게 되면 횡단도 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래도 진통제라도 맞아보기 위해서 오늘 하루 쉬겠다고 말했다. 그러나 일이 너무 복잡했다. 의사가 왕진을 와야 되고 그렇게 또 진단받아서 동네의 문 열려있는 약국을 찾고 간호사를 찾아서 주사를 맞아야했다. 너무 절차가 복잡하고 금액이 생각한 만큼보다가 훨씬 더 든다는 사실을 알았다. 나는 도저히 한인회에 부담을 덜 주기 위해서 생각을 바꾸어야만 했다.


출발하기로...고통을 참을 수 있을 때까지만 해보기로 했다. 그렇게 작별인사를 하고 우리가 그 도시를 벗어날 때까지 총무님이 에스코트를 해주셨다. 휠체어를 타고 1킬로.2킬로를 더갈수록 고통이 더해진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너무 아파서 휠체어 조정이고 뭐고 다 그만두고 싶었다. 님스 라는 도시에 안간힘을 쓰면서 도착해보니 시간은 5시반밖에 되지 않았다. 25킬로 정도를 더 가도 되는데 나는 곧 스톱했다.


경비가 부족해 당장 이번 주 안에 자동차 연료비가 없어 길거리에 스톱해야 하는 한이 있어도 숙소를 얻었다. 그러고 난 뒤 일찍 쉬려고 했으나 곧 나는 상환이를 일을 시켰다. 전동휠체어 스페어 타이어를 다 수리하고 준비해놓으라고 했다. 아프다면서 그걸 다 지켜보고 지금은 들어와서 누워있다. 지인이한테 골반을 좀 마사지 해달라고 해야겠다.




프랑스 2007년 5월 21일 월요일


온도 29도 종단거리 70.1Km PM1:15 - PM9:50


mas blanc des alpilles~canal du rhone a sate~st etienne ou gres~le vistre~manduel~molleges~redessan~jonouieres st vincent


휠체어 바퀴가 굴러가면 굴러가는 만큼 그정도의 1킬로,1킬로 가는 만큼 나는 죽음의 길로 가는 것과 같다.


자고 일어나면 조금이라도 나아지기를 바라는 마음에 그 마음 아랑 곳 없이 자꾸 골반의 고통이 커지기 때문에.. 미국에서 죽는 것 보다가 더 힘들었던 그 골반의 아픔이 되살아나고 그걸 생각해보면 그 어떤 거와 골반의 아픔을 대신할 수 있느냐고 하면 나는 못할 것이다. 아니한말로 죽는다는 것이 쉽지 그 골반의 아픔의 고통을 다시 한번 느끼라고 한다면 나는 모든 걸 다 버려서라도 그 고통을 맛보지 않을 거라는 것이다.


아침에 일어나 준비를 하고 아픔 고통을 참으면서 휠체어에 앉아 출발을 했다. 근데 지인이가 보채서 출발이 끊겼다. 뭐냐하면 우리가 쉬었던 숙소에 모든 필요한 것들은 다 파는 대형 마켓이 다 몰려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두 세 군데 쇼핑을 안가면 하루 종일 징징거리면서 울꺼라고 나한테 어제 저녁부터 성화를 부렸기 때문에..그렇게 나도 같이 둘러본 것이다. 정신이 다른 쪽으로 집중되니 아픔 고통을 그럭저럭 참을 수가 있었다.


이러다보니 10시 30분에 숙소를 나왔지만 오후 1시가 넘어서야 횡단종단을 시작하게 된 것이다. 가다가 아파서 몇 번이나 쉬고 물고 있는 조정기를 부러뜨리고 이게 몇 번째인지 모르겠다.


상환이와 지인이는 차안에서 걱정이 되어서 어떻게 하면 좋을까하는 두사람끼리 대책에 대해서 이야기도 해보았다고 한다. 나는 그것도 아랑곳없이 골반의 고통과 힘겨운 싸움을 계속 해가면서 휠체어를 앞으로만 계속 전진해 나갔다. 그렇게 힘든 날을 조금이나마 위로를 해주는 거와 같았다. 오후5시가 넘으니 초록색의 잎이 덮혀있는 가로수 나무들이 터널을 만들어 그 속을 계속 통과할수 있었기 떄문이다. 풀냄새가 코 안으로 들어올 때마다 잠깐이나마 진통제라도 되어줬으면 좋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런데 또 생각지도 않은 일이 벌어졌다. 골반의 고통을 참는 데까지 참고 있는데 큰 벌레가 갑자기 내 눈으로 날아들어온 것이다. 난 눈이 아파 뗄 수가 없어서 입에 물고 있는 조정기를 놓칠 수 밖에 없었다. 근데 그 조정하는 막대기가 내 손에 걸려 휠체어가 빙글빙글 회전을 한 것이다. 뒤에서 애들이 놀래서 차를 세우고 뛰어 내려와서 전동휠체어의 전원을 끄고 눈안의 벌레를 상환이는 불어내고 그렇게 한바탕 쇼를 했다.


만약에 그때 차가 많았으면 내가 어떻게 되었을지도 몰랐을 일이다. 지인이가 그걸 생각했기 떄문에 놀래서 어쩔 줄을 몰랐다. 그러면서 나 회장님 땜에 놀래서 청심환 먹어야 되겠다고 날 더 웃기려고 재치를 발휘한 것이다. 그래서 출발하여 큰 도시가 나왔지만 시간은 밤10시가 다 되었다.


더 이상 없는 경비로 숙소를 잡을 수 없어 폴리스를 찾아갔다. 우리를 유쾌히 친절하게 도와주셨다. 그래서 캠핑장 안의 조립식 방 즉 캠핑카를 집으로 만들어놓았다면은 잘 이해가 될 것이다. 또 주인은 우리에게 먹을 음식도 주셨다. 지금 1시가 넘었다. 그래도 간단하게 해놓은 밥을 들고 와서 세 사람이 같이 먹기로 했다.


근데 밥을 먹는 도중에 대책회의를 하자는 것이다. 도저히 이래서 안된다는 것이다. 상환이와 지인이가..모든 것 보다가 몸이 첫째지 여기서 더 아프면 어떻게 할 수가 없으니 지금 하루라도 빨리 한국에 가는 것이 어떻겠느냐 하는 의견이었다. 나도 그것만 생각하면 내일이라도 돌아가야 하는데 몇 일 전의 마음과 같이 나는 지금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기 때문에 미칠 것만 같다.




슬로베니아 7월 9일 월요일


온도 48도 종단거리 60Km PM12:00 - PM8:40


kromberk~ potok lijak~ ozelian~ sempas~vitovlje~ crnice~ selo~ vrtovin~ potoce~ dobravlje~ cesta~ vr nivec~ ajdovscina~ hubelj~ bela~ reka vipava~ GACKA~ mocilnik~ podnanoos~ razdrto~ slavinje~hrusevje~hrasce~postojna


슬로베니아를 들어와서 첫날부터 현지 장애인 단체에 신세를 지고 그 덕분에 우리는 편안하게 잘 쉬었다.


아침이 되어 회장님과 사무장님께서 안부 인사를 오셨고 신문과 텔레비전 그리고 라디오 등 5군데에서 나를 인터뷰하러 나왔다. 나에 대변인 역할을 하는 주군이는 기자들에게 나의 뜻을 다 설명했다. 그리고 나서 회장님과 사무장님의 차로 에스코트를 받으면서 출발을 했다. 시작하자마자 산길이 시작되었다. 슬로베니아는 산으로 이루어졌는지 하루 종일 꼬불꼬불한 산이었다. 그런데 이탈리아보다 이곳 날씨가 더 더운지 휠체어에 붙어있는 온도계가 48도까지 올라갔다.


입고 있는 옷마저도 살갗에 스치니 뜨거운 다리미가 피부에 닿인 것 같았다. 숨이 막히고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온도계를 살펴보니 48도를 가리키는 것이다. 진짜 어떻게 그 높은 온도에서 견딜 수 있었을까..여하튼 내가 생각해도 도저히 이해를 못하겠다.


그렇게 오후가 되니 그 뜨거운 열을 식혀주기 위해서인지 비가 가끔씩 하늘에서 내렸다. 그리고 까마득한 높은 산도 올랐고 지나가던 현지분들이 뜨거운 날씨였지만 격려를 아끼지 않았다. 그리고 어떤 분은 차를 일부러 돌려와서 나에게 격려를 해주고 또다시 돌아가시는 분들 등 또 어떤분들은 큰 음료수를 2개나 사들고 오셔서 주시고 가셨다.


슬로베니아 대사관에서 또 신경써주신 덕분으로 숙소를 무료로 자게 되었다. 포스타냐에 시장님이 숙소를 계산하고 또 이곳 장애인 단체에서 마중나오시고 저녁까지 사주셨다. 그렇게 저녁을 먹으면서 이야기를 나누었는데 다행히도 영어를 능수능란하게 하시어 주군이가 통역을 하고 대화가 이루어졌다.


슬로베니아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는데 장애인이 탈 수 있는 저상버스는 수도에만 80%가 되있고 이 슬로베니아의 총인구가 20만명이라고 했다. 지금 우리는 그렇게 즐거운 식사를 마치고 인사를 나누고 지금 숙소에 들어와서 쉬고 있다.


주군이는 얼마나 피곤한지 지금 잠깐 눕더니 탱크가 굴러가는지 지진이 일어나는지 지금 앉아있는 침대마저도 들썩거리는 느낌이 오는 것 같다. 거기다가 바깥에는 비가 왜 이렇게 퍼붓는지 모르겠다. 오후에는 비가 조금씩 오더니 이제는 소나기가 온다. 여하튼 내일은 비가 오지 않아야 될 텐데...아참 그리고 영국에 SBS에서 지난번 교황님과의 면담모습을 사진을 구해 기사화시켜 늦었지만 지금 한국연합에서 기사화가 되어 지금 이슈화가 되고 있다는 연락을 받았다. 왜 우리나라는 과정은 중요하지 않고 보이는 것을 중요시 여기는 것인지..이런 잘못된 생각이라고 할지 관습이라고 할지 언제 바뀔지 모르겠다.


오늘의 슬로베니아어 한마디:이쁘다:리빠 문제없다:디플로마 행복한 여행되세요:씨에노치




독일 8월 15일 수요일


26098.9KM


온도 28도 종단거리 21Km AM9:50 - PM1:30


charlottenburg-wilmersdorf


오늘이 결승전 마지막날인데 밤에 내리던 비는 멈추지 않고 계속 내렸다. 하늘이 왜이렇치 하면서 비옷을 입기로 했다. 그런데 마침 출발하려고 하니 하늘이 나를 베를린 결승전에 가는것을 축하하기 위해서인지 비가 그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입었던 비옷을 벗고 모처럼만에 또 정장을 입고 어색한 기분으로 휠체어를 조정하기했다. 근데 베를린 장벽 오기전에 오늘이 8월15일 광복절이라서 일본대사관 앞에서 위안부 시위하는 현장에 잠시 참가했다.


일제 강제시대 때 우리나라 분들의 피해 입은 위안부 분들의 사진을 보니 그 당시에 내가 있었던 것처럼 마음에 뭔가가 치밀어 올라오는 것을 느낄수 있었다. 그러고 있는 참에 나는 위에 올라가 나에 대한 소개를 했고 나에게 한마디 할 수 있는 시간이 주어져 나는 일본 대사관으로 향하여 촉구하는 발언을 하였다.


한인회 회장님 안내를 받으면서 베를린 장벽으로 향했다. 시간은 오후 1시 30분, 드디어 15개월 만에 킬로수는 26000킬로,종착지인 베를린 장벽이 눈앞에 펼쳐지면서 엠비시,케이비에스.연합뉴스,독일기자들 모두가 카메라 후라쉬를 터뜨리면서 나를 촬영했다. 그 자리에는 대사관 직원분들, 독일에서 국회의원이시고 장애인 단체를 총괄하고 계시는 쟈이퍼트라는 분이 나를 축하해주셨다. 그리고 꽃다발도 준비해주셨다. 또한 격려말씀도 듣고 평화의 메시지도 낭독하며 배를 카페로 개조한 곳에서 이야기도 나누었다.


그러고 난뒤 대사관에서 준비한 한국인 식당에 점심식사를 하기위해서 들어갔다. 우리는 아침도 먹지 않은 상태로 몹시 배가 고팠다. 그리고 또 오랜만에 물냉면을 먹을수가 있었다. 그렇게 맛있게 먹고 대사관과 한인회에서 준비해주신 숙소로 왔다. 그렇치만 내가 오늘 그 길고도 먼길을 출발하여 마지막 장벽까지 와서 마쳤지만 도저히 마쳤구나. 해냈구나,.하는 기분보다는 끝나지 않았다는 기분이 들었다고 하는 것이 정확할지 어떻게 표현할지 몰랐다. 꼭 표현하자면 마무리 했을 때에 또 다른 새로운 것을 시작하는 그러한 기분이라고 표현하고 싶다. 그 다음으로 신보나씨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드리고 싶다. 영국에서 나의 기사를 보고 머리를 무료로 잘라주겠다고 연락온 그것이 나에게 큰 힘이 되고 응원을 해주시는 분이 되었다. 바로 그 분이 오늘 나와 마무리하는 것을 축하해주기 위새서 몇날 몇일을 밤을 새우면서 이곳까지 오신 것이다. 진짜 그분과 저녁을 먹고 맥주도 한잔 하고 조언을 듣고 헤어진 후에 지금 숙소 안으로 들어온 것이다. 이런분들이 있었기에 내가 이곳까지 온 것이지 아니면 올수가 없었을 것이다.


오늘의 한마디


행운 - 글럭


나무 - 바운


물 - 바서


집 - 하우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