횡단일지

횡단일지

1999년 국토종단 일지

작성자
관리자
작성일
2017-06-21 11:28
조회
1086
10월 4일 월요일

준비 끝에 우리나라 2002년 월드컵의 성공적 개최를 위한 국토종단이 시작되었다.이 종단을 내 혼자가 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나라 전 국민이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 국토 종단을 나 혼자 준비했는 것이 아니라 주위의 모든 분들이 다 도와주셨기에 이 어렵고 힘든 국토종단을 실행할 수 있게 되었다.
지금 나는 이 글을 쓰면서 온갖 생각이 교차되고 있다. 누군가가 이렇게 어렵고 힘든 일을 왜 하느냐고 나에게 묻는다면 내 자신한테 나의 한계를 시험하는 것도 있지만은 이런 중증의 몸으로 힘든 일에 도전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성공시켜 장애인들에게는 어떤 장애라도 불가능이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비장애인들에게는 장애인이 100% 도움을 받는 것이 아니라 사회에 기여할 수 있고 더불어 살수 있다는 것을 알게 하기 위함이다.
오늘 주행했는 거리는 이제까지 전동 운전했는 것 중에서 가장 오래했는 것이다. 오전 9시에 출발하여 저녁 7시까지(점심시간 빼고) 9시간 동안 운전했다.
30년이라는 긴 세월을 집안에서 지내며 나는 태어나기 전에 어떤 용서받을 수 없는 무서운 죄를 지었기에 이런 벌을 받고 있을까 라고 생각하곤 했다.
태어나기 전에 지은 그 죄로 내 몸이 이렇기에 그 벌로 또 죄를 짓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살다가 장애인 수용시설에 들어가려고 생각했었다. 기회가 닿아서 장애인 수용시설이 몇 군데를 가 보았다. 내가 몰랐던 사실을 알게 되었다.
몸에 장애가 있는 것도 억울하다고 할 수 있는데 몸에 장애가 있다는 그 이유 하나로 인격체인 사람의 인권이 유린당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나는 이들을 위해 할 일이 없을까 하는 새로운 생각을 가지게 되었다.
여러 생각 끝에 장애인들을 위해 내가 먼저 행동으로 실천하고 행동하는 모습을 보여주겠다는 마음으로 95년부터 세상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였다.
나와서 첫 번째로 했는 일은 장애인, 비장애인이다 라는 것을 구별하지 않고 서로 서로 더불어 살아가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모임을 만들고 그러다가 손, 발을 자유롭게 쓰지 못하는 내가 비장애인들과 서로 어울리며 살아갈 수 있다는 것을 몸소 행하기 위해 부모님 반대도 무릅쓰고 집에서 독립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고생도 많았다. 그렇지만 고마운 분들을 알게 되었다.
오늘 이렇게 무사히 출발하게 된 것은 내가 제일 존경하는 통허스님께서 오래 전부터 도와주셨기 때문이다. 우리 이선생과 둘이 준비를 하였으나 국토종단 하루 전날에 전동휠체어가 작동되지 않았는데 일요일이라서 공장과 담당자도 연락이 되지 않아 무척 애를 태우고 발을 동동 굴렸다. 그렇다고 해서 날을 바꿀 수도 없고 하여 고심 끝에 차영준씨 전동훨체어를 타고 출발하였다.
전동훨체어 때문에 걱정이 되어서 밤에 잠도 설쳤다.
그러나 어머님과 시청, 구청, 수성구청, 달서구청에서 나와주셔서 격려도 해 주시고 특히, 남구의 이재용청장님은 월드컵경기장 앞에서부터 도로 1km까지 몸소 뛰어서 잘 다녀오라고 격려해 주셨다. 다행히도 차영준씨 전동훨체어를 타고 경산시 경상병원에 도착했을 때 대세훨체어 최윤동차장님이 선 접촉이 되지 않았는 걸 고쳐서 병원 앞에까지 갖다 주셨다.
원래 경산을 거쳐 청도를 지나 울산으로 가려고 했으나 차장님과 모범운전자 협회분들이 청도쪽은 길이 좁고 고개가 높아서 힘드니 하양 경주 쪽으로 코스를 바꾸었다. 도중에 통허스님과 성복, 수진씨 부부가 영남대까지 나오셔서 진량까지 에스코트 해 주시고 점심식사도 사 주시고 돌아가셨다. 성복씨도 횡단도중에 무슨 일만 있어 연락만 주면 회사에 휴가를 내고 올 테니 언제든지 연락해 달라는 소리를 듣고 가슴이 찡했다. 모범운전자 연합회는 영천 시외버스터미널까지 에스코트 해 주셨다. 도중에 경보음을 울리면서 지나가는 차를 막아주실 적에는 어떤 어려움 있어도 꼭 성공시켜야 되겠다는 마음을 다져먹었다. 영천에 도착하여 영천역 근처에 돈이 없어 허름한 여인숙에 방을 얻었다.
방에 들어오자마자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고 하루 종일 고생했는데 이선생한테도 많이 미안했다. 돈만 있으면 방도 좋은걸 얻고 방도 2개를 얻었을 텐데...
우리 두 사람이 떳떳하면 그만임에도 불구하고 주위사람들이 오해의 눈으로 볼까봐 그것도 신경이 쓰였다.
아~참! 잊은 것이 있다.
영천이 가까워지는데 영천병원의 이용락 외 1명이 지나가다가 격려도 해주시고 1만원 후원해 주셨다. 지나가다가 나의 국토종단을 하는 모습을 본 영천신문의 기자님이 인터뷰도 하고 영천 모범운전자회에 연결도 해 주었다.


10월 5일

아침 7시 30분에 기상..
아침 9시에 영천 모범운전자와 출발약속이 되어있어 출발준비 하느라고 아침도 못 먹어서 이선생에게 제일 미안했다. 출발하였으나 목과 허리, 등, 온몸에 진통이 왔다. 이렇게 해서 오늘은 건천까지도 가지 못하게 되는 건지 아닌지 생각이 들었다. 눈앞이 어지럽고 눈이 자꾸 감기려고 했다. 지나가시는 분들이 박수도 쳐 주시고 격려해 주시는 소리를 들은척하다. 애써 감기는 눈을 더 크게 뜨려고 하였다. 하늘을 쳐다보니 구름이 끼여있고 들판에는 누른 황금 같은 곡식이 지난 비에 쓰려져 누워있었다. 이제까지 고생하시는 농부님들의 마음을 읽을 수 있었다. 영천 모범운전자에서 바쁘시면서도 경주까지 에스코트 해 주었는데 눈이 감기는 것이 미안하기만 하였다. 만불산을 지나다가 산 위에 큰 부처님이 서 계시는 걸 보았다. 먼데서 보았지만 부처님이 나를 보고 미소를 지어 주시는걸 보았다. 그 모습을 보고 나는 느꼈다. 어떤 어려움이 닥쳐도 해낼 수 있다는 것을 한번 더 느꼈다.
경주에 도착하니 경주 모범운전자회에서 반갑게 맞이해 주셨다. 모범운전 사무실의 쇼파에 앉으니 허리가 부러지는 듯한 고통을 느꼈다. 쉬고 있으니 얼마 후 충전기 때문에 연락한 동생이 대구에서 직접 찾아왔다. 거기서 바로 울산으로 출발하였다. 나의 동생이 바로 내려가지 않고 경주모범과 함께 에스코트해 주었다. 이 때 나도 모르게 가슴에서 뭔가 저릿한걸 느꼈다.
6시가 조금 넘자, 해는 저 버려 많이 어두워졌다. 7시까지 왔는 곳이 여기 불국사까지 밖에 오지 못했다. 오늘은 여기 불국사에서 여장을 풀기로 했다. 동생이 숙소도 잡아주고 저녁식사도 시켜준 후 대구로 내려갔다.


10월 6일

또 출발할 아침이 되었다. 몸은 더 감각이 없는 것 같고 그렇지만 아직까지 정신은 또렷하다. 오늘 또 아침은 굶어야 하나 내가 굶은 것을 둘째고, 말은 안해도 하루 종일 고생하는 이선생이 아침도 못 먹이는 것이 마음이 아프다.
9시가 되자 경주 모범운전자에서 에스코트 해주러 오셨다. 출발 짐 챙기는 것도 많이 도와주셨다. 출발했는지20분 정도 안 되어서 속은 울렁거리고 목과 온 몸이 아파왔다. 도저히 견딜 수가 없어서 식당을 찾아서 들어갔다. 식사하면서 조정하는 것이 너무 힘이 들어서 입으로 조정하도록 새로 조정기를 만들었다. 오후 1시에 울산 경계선에 들어오자 울산월드컵경기장에 도착하였다. 울산의 가을비가 우리를 반겨 주었다. 거기의 울산시민들과 운전자들 고등학생, 중학생 등이 박수를 치면서 격려를 해주었다.................